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의 예혼을 담은 가무악극 <운림산방 구름으로 그린 숲>에서 허련 역의 배우가 연기하고 있다. 국립남도국악원 제공
“마음속에 한 폭 산수를 품어 준비하고, 신명 속에 항상 세상을 내려보고 속계를 초월한 자품(姿品)이 있은 뒤에 붓을 대야 그림의 삼매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세계에 이른 것은 소치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소치 실록>에는 다산 정약용의 장남 정학연이 허련을 상찬한 대목이 나온다.
조선 말기 화가 소치(小痴) 허련(1809~1892)은 <하경산수도> 등으로 유명한 한국 남종화의 대가다. 남종화는 붓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먹의 은은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강조한 산수화 유파다. 허련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제자로 글·그림·글씨에 모두 능해 삼절로 불렸다. 스승을 따라 추사체를 쓰기도 했다. 추사는 제자 소치를 두고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고 극찬했다.
허련-허형-허건과 허림-허문-허진으로 이어지는 ‘소치 가문’은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 명문가이다. 허련은 말년에 진도 ‘운림산방’에서 창작활동을 했는데, 1982년 소치의 손자 남농 허건이 복원해 국가지정 명승 제80호가 됐다.
허련의 치열한 예혼과 삶이 130년 세월의 빗장을 풀고 가무악극으로 환생했다. 국립남도국악원이 진도 지역 전통 공연예술을 집약시킨 브랜드 공연 <운림산방 구름으로 그린 숲>이다. 지난해 9월 진도 국립남도국악원 초연 때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이달 서울 국립국악원에 이어 국립부산국악원 무대에 오른다.
가무악극 <운림산방 구름으로 그린 숲>에는 국립남도국악원 단원들이 모두 참여해 진도 지역 전통예술의 고갱이를 담았다. 국립남도국악원 제공
가무악극의 얼개는 허련과 아들 허형 부자의 갈등관계로 짰다. 줄거리는 이렇다. 허련은 인물 좋고 재주가 뛰어난 큰아들 허은을 편애했다.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재주가 두드러지지 않던 넷째 아들 허형에게는 농사일과 자질구레한 일을 시키며 홀대했다. 하지만 기대를 모았던 허은은 요절하고 허련은 낙담한다. 뒤늦게 허형의 그림 솜씨를 확인한 허련은 그제야 아들이 재능을 발휘하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진도의 전통예술과 자연풍광을 망라해 차려낸 ‘남도 으뜸 공연 상차림’이다. 국립남도국악원 전 예술단이 출연해 진도 민속예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40여명의 기악단, 성악단, 무용단원은 진도북춤, 강강술래, 진도아리랑, 씻김굿, 남도들노래, 남도잡가 등 진도 민속예술의 악가무 일체와 정수를 전한다. 진도 민속예술은 국가무형문화재, 유네스코 지정 인류무형유산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 화려한 허련의 서화 이미지와 다양한 영상 연출을 더해 자칫 지루하기 쉬운 전통예술 공연에 재미의 옷을 입혔다.
이번 작품은 뮤지컬 연출가 김삼일이 총연출을 맡고 소리극과 뮤지컬 등의 극본 등을 맡은 강보람 작가가 대본에 참여했다. 음악에는 뮤지컬 <김종욱 찾기>의 김혜성 작곡가가 국립남도국악원과 호흡을 맞췄다.
김삼일 연출은 “현재 우리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한편, 전통 계승의 진정한 의미를 물을 것이다. 이야기 갈피마다 소중한 문화유산인 서화와 전통 공연예술에 얽힌 아름다운 삶을 담아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전석 1만원. 오는 10일 저녁 8시와 11일 오후 5시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 (02)580-3300, 24일 저녁 7시30분과 25일 오후 4시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 (051)811-0114.
손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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