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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아마 주인공은 이런 느낌 모를걸요?

등록 2017-06-15 20:12수정 2017-06-15 21:12

대한민국발레축제 참가작 ‘스텝 바이 스텝’
세계적 발레리노 김용걸 교수 ‘안무’
15년차 군무 발레리나 이향조 ‘주연’
“주역 아니어도 충분한, 우리 모두의 얘기”
대한민국 발레축제에서 <스텝바이스텝>을 선보이는 무용수 김용걸(오른쪽), 이향조 씨가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습실에서 연습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대한민국 발레축제에서 <스텝바이스텝>을 선보이는 무용수 김용걸(오른쪽), 이향조 씨가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습실에서 연습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백조들의 칼군무가 백미인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 2막 한 장면. 군무 무용수 한명만이 덩그러니 서 있다.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녹음 반주도 없다. 오로지 제 목소리 연주와 동작 설명에 따라, 토슈즈 신은 발을 사뿐사뿐 옮겼다가 절도있는 포즈로 장면을 전환한다.

“3막이면 백조들이 2시간 넘게 무대를 뛰어다니느라 지친 상태예요. 마침내 주역들을 가로질러 살포시 내려앉았을 때, 등 뒤로 굵은 땀방울 하나가 흐르다가 꼬리뼈에 대롱대롱. 그러다 톡! 떨어지면 그 기분은 말도 못하게 짜릿하죠. 아마 주역들은 이런 느낌 모를걸요?” 흡사 무용 수업, 아니면 일인극 같다.

9일 오후, 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습실에서 제7회 대한민국발레축제 참가작 <스텝 바이 스텝>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15년간 국립발레단 군무에 머물러야 했던 이향조(38)씨의 솔직한 독백과 춤으로 40분을 채우는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안무는 파리오페라발레단 솔리스트 출신으로, 발레리노로서 국내 최정상에 올랐던 김용걸(44) 한예종 교수가 맡았다.

대한민국 발레축제에서 <스텝바이스텝>을 선보이는 무용수 이향조 씨가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습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대한민국 발레축제에서 <스텝바이스텝>을 선보이는 무용수 이향조 씨가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습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경북 구미의 유일한 무용학원에서 다소 늦은 열네살에 발레를 시작한 이씨는 경북예고·한양대를 거쳐 2003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발레단에 들어와 언젠가 주역이 되리라는 꿈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가끔 솔리스트 역을 맡았을 뿐 군무를 벗어나진 못했다. 후배가 승급하고, 군무에 머문 동료들이 살길을 찾아 떠나는 동안 그는 “발레만큼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이 없어” 쉽게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다. 결국 지난해 <라 바야데르> 시녀 역을 끝으로 더는 배역을 얻지 못하자 올 3월 제 발로 발레단을 나왔다.

“춤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과 기분을 알 수 있다”는 김용걸 교수는 이씨의 춤이 “늘 아팠다”고 했다. 이어 “주역 무용수의 삶을 다룬 작품은 흔한 만큼 내용도 뻔하다. 반면 누구보다 발레를 사랑했지만 주역이 되지 못한 그의 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요소가 많아 훨씬 귀하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씨의 사연을 직접 대본으로 정리했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를 그만두고 홀연히 프랑스 파리로 떠나 5년간 군무 생활을 견뎌냈던 자신의 경험 덕에 글은 더욱 풍성해졌다. “커튼콜마다 한국 관객이 무대 제일 뒤에 선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 바랐다”는 그였다.

대한민국 발레축제에서 <스텝바이스텝>을 선보이는 무용수 김용걸 씨가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습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대한민국 발레축제에서 <스텝바이스텝>을 선보이는 무용수 김용걸 씨가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습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두 사람에 따르면 발레에서 군무는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면서도 주목은 거의 받지 못하는 존재”다. 대체가 곤란한 주역과 달리 배역을 빼앗길까 아픈 티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씨는 “주역을 맡아 너무 기쁘다”면서도 “내 하찮은 이야기에 관객들이 정말 공감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된다”고 했다.

그의 우려와는 정반대로 작품의 힘은 민낯을 드러낸 그의 솔직함에서 나온다. 수치심 때문에 일부 내용을 지워달라고 울면서 매달린 것도 여러 차례. 하지만 그가 낸 용기 덕에 최종적으로 작품은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열패감과 절망, 그리고 소소한 희망을 서사하게 됐다. 만년 군무 무용수가 소재지만 남의 눈치를 보느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속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 언제든 다른 인력으로 대체될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노력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청년실업자 등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도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작품은 이향조씨의 독백과 고전·현대 발레를 오가는 춤으로 조화롭다. 현악 라이브 연주는 가만가만 감정을 건드리고 간헐적으로 영상도 사용된다. 특히 이씨가 바퀴 달린 여행가방과 2인무를 추는 장면은 그로테스크하고도 강렬하다. 관객이 축 처진 마음으로 찝찝하게 돌아가지 않도록 유쾌한 반전도 준비돼 있다. 이번에도 김용걸은 대중적인 안무가라는 정체성을 이어간다.

작품은 프랑스 안무가 제롬 벨이, 은퇴를 앞둔 파리오페라발레단 군무 무용수를 프리마돈나로 세운 <베로니크 두아노>(2004)와 형식적으로 닮아 있다. 실제로 김 교수는 파리 유학 시절 이 공연 시연회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은 기억이 있다. 그는 “모방했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으나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며 “지금은 여러 가지를 실험하면서 내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17,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02)580-1300.

대한민국 발레축제에서 <스텝바이스텝>을 선보이는 무용수 김용걸(오른쪽), 이향조 씨가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습실에서 연습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대한민국 발레축제에서 <스텝바이스텝>을 선보이는 무용수 김용걸(오른쪽), 이향조 씨가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습실에서 연습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김혜경 프리랜서 기자 salutkye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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