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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등록 2017-07-14 20:26수정 2017-07-14 20:39

[토요판] 김미경의 그림나무
(14) 서촌꽃밭 지도
여름 서촌 골목에서,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여름 꽃들이다. 맨드라미, 2015년 6~8월, 펜&수채, 10×15㎝.
여름 서촌 골목에서,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여름 꽃들이다. 맨드라미, 2015년 6~8월, 펜&수채, 10×15㎝.

내 컴퓨터 속엔 ‘서촌꽃밭 주소록’이라는 엑셀 파일이 하나 있다. 한 번씩 열어 보며 혼자 흐뭇해하는 파일. 110번까지 번호가 매겨진 꽃그림 이름 옆엔, 꽃이 피어 있던 주소가 빼곡히 적혀 있다. 채송화(창성동 1○○-○, 사직동 3○○-○○), 맥문동꽃(내자동 2○○), 분꽃(체부동 1○○-○), 맨드라미(누하동 1○○), 도라지꽃(통인동 4○-○), 백일홍(통인동 3○-○), 부추꽃(필운동 1○○)…. 2015년 1년 내내 동네 꽃을 따라 그리다 만든 파일이다. ‘화가가 꽃만 그리면 되지, 꽃이 피었던 곳의 주소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비웃는 사람도 많겠지만, 내겐 일기장처럼 소중하게 느껴진다. 틈날 때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꽃 안부도 챙기고, 파일 속 꽃 주소도 업그레이드한다.

뜨거운 여름 속으로 쑥쑥 빨려 들어가는 계절. 파일 주소 속 여름 꽃들이 잘 피고 있나 뒷짐 지고 동네 꽃밭 구경 가는 게 나만의 피서법이다.

능소화
능소화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어릴 때 즐겨 불렀던 동요 ‘꽃밭에서’ 가사에 등장하는 채송화, 봉숭아, 나팔꽃. 50대 이상 국민을 대상으로 ‘가장 정겨운 꽃’을 묻는 설문조사를 한다면, 1, 2, 3등을 나란히 차지할 것 같은 ‘추억의 꽃’. 서촌 구석구석에서 수줍게 피어나는 대표적인 여름 꽃들이다. 옥인동, 누상동, 누하동 담벼락 여기저기 타고 올라가며 피는 나팔꽃을 제대로 보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 늦잠 자고 나가 보면 꽃잎이 벌써 입을 앙다물고 있다. 사직동 뒷골목 땅바닥에는 채송화가, 필운동 식당 골목 앞에는 봉숭아가 올해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곱게 피었다.

내가 그린 서촌 꽃그림이 백년쯤 후
2010년대 서촌에 피었던 꽃들에 대한
회화적 기록뿐 아니라
역사적·식물학적 기록이 되지 않을까?

필운동 승동교회 마당 꽃밭엔 접시꽃이, 통인시장 후문 쪽 어느 집 밖 꽃밭에선 백일홍이 벌써 만발했다. 누하동 뒷골목, 창성동 꽃집 옆에선 맨드라미가 한창 꽃피울 준비에 바쁘다. 경복궁 영추문 건너편에 있는, 이효석의 동명 소설 이름의 식당 ‘메밀꽃 필 무렵’ 앞 화분에서는, 메밀꽃도 자란다. 여름이 무르익으면, 쌀알 크기만한 흰 꽃들이 뭉쳐 피어나기 시작할 게다.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심심 산천에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 스리살살 다 넘누나’ 노래가 절로 나올 백도라지꽃도 참여연대 뒷골목에 있는 70년 된 한옥 담 밖 작은 꽃밭에서 피어날 게다.

도라지꽃
도라지꽃
서울 여느 꽃집이나 대로변 화단에서는 찾기 힘든 이들 ‘애틋한’ 꽃들이 서촌에서 피어나는 건, 뒷골목 오래된 집에 사는 토박이 할머니들 덕분이다.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꽃, 우리 땅에서 오래 함께 살아온 꽃, 산이나 들에서 자란 꽃, 화분이 아니라 골목이나 마당에서 자라는 꽃’을 그리며 서촌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 알게 된 사실이다. 여름 꽃으로 장미보다 도라지꽃,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가 더 정겹고 좋았던 할머니들이 집 앞에, 골목길에, 정성껏 가꿔왔던 것.

우리 옛 그림들 속에는 어떤 꽃들이 있을까 궁금해,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2·3>(눌와 출판)에 실린 옛 그림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역시 매화, 난초, 국화가 압도적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연꽃, 모란, 복숭아꽃, 진달래, 찔레꽃, 패랭이꽃 순…. 가장 풍성한 여름 꽃이 등장하는 그림은 신사임당의 ‘초충도’였다. 맨드라미뿐 아니라 다른 옛 그림에서 찾기 힘든 봉숭아꽃, 여뀌, 닭의장풀, 원추리도 등장한다. 하지만 옛 그림 속 꽃들이 어디에, 언제 핀 것들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그림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채송화
채송화
오늘도 새로운 맨드라미를 발견해 앉아 그리면서, ‘서촌꽃밭 주소록’ 파일을 업데이트한다. ‘내가 그린 서촌 꽃그림이 백년쯤 후 2010년대 서촌에 피었던 꽃들에 대한 회화적 기록뿐 아니라 역사적·식물학적 기록이 되지 않을까?’ 혼자 우쭐해하면서. 꽃들 뒤에 서촌 풍경을 집어넣는 방법도 좀 더 고민해봐야겠다. 여름 꽃들과 함께, 여름이 황홀하게 깊어간다.

※ 당신의 꽃을 그려드립니다!

‘김미경의 그림나무’ 애독자를 위한 여름 특별 이벤트입니다. 제일 좋아하는 꽃, 재미난 사연이 있는 꽃 이름을 사연이 담긴 짧은 글과 함께 보내주시면, 두 분을 선정해 그려드리겠습니다. 서울에서 한 분, 지방에서 한 분을 뽑겠습니다. 전자우편 주소 morgen@hani.co.kr로 7월31일까지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수국
수국

옥잠화
옥잠화

2015년엔 꽃만 쫓아다니며 그렸지만, 2016년부터는 꽃 뒤의 풍경도 함께 그려보기 시작했다. 나팔꽃, 2016년 7월, 33.5×24.5㎝.
2015년엔 꽃만 쫓아다니며 그렸지만, 2016년부터는 꽃 뒤의 풍경도 함께 그려보기 시작했다. 나팔꽃, 2016년 7월, 33.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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