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우리가 사진을 망쳤다. 바이욘사원’
나는 초짜가 아니야 노디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짐을 챙겨들고 나왔다. 공항까지 가는 리무진 버스까지 엄마가 태워다 주실 줄 알았는데, 엄마 아빠 나가시며 하시는 말씀. “잘 갔다와.” 그래서 나는 털레 털레 택시를 잡아타고 리무진 버스 정류장까지 향했다. 도착하니 노디는 가족들과 함께 미리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 꼭 같이 다녀라’는 노디 부모님의 걱정 섞인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히 갔다 올게요’ 인사를 하고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함께 버스에 오른, 대한항공 스튜어디스 언니를 보며 ‘이쁘다’를 연발하면서. 히히. 두 번째로 가는 인천 공항. 작년엔 ‘해외봉사단’으로서 몽골에 가느라 갔는데, 이번엔 순전히 ‘관광객’으로서 캄보디아 . 베트남에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한다. 여전히 커다랗고 번쩍번쩍하고 북적북적한 공항에 도착해, 두 번 온 티를 내며 처음 온 노디보다 앞서 뚜벅 뚜벅 발걸음을 내딛는다. 노디 앞에선 태연한척, 떨리지 않는척 했지만, ‘둘이서’ 마주한 공항이기에 사실 무진장 떨렸다. 여행사 미팅 시각보다 한 시간 일찍 와서는 핸드폰 로밍도 알아보고, 밥도 먹고, 공항 구경도 했다. 그리고는 시간 맞춰 여행사 미팅 장소에 갔다.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먼저 온 사람은 먼저 출국 준비를 했다. 짐을 부치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고, 출국 심사를 하고, 드디어 면세점! 사야할 것이 꼭 하나 있었기에 부랴부랴 옷 가게로 향했다. 예리한 눈썰미로 애인과 나를 위한 커플 티셔츠를 샀다. 그의 몸에 꼭 맡기를, 그가 입고 참 좋아하길 바라기를. 그리고, 비행기에 올랐다. 몽골 갈 때 탔던 ‘복도 두 개’의 비행기보다 훨씬 작은 ‘복도 한 개’의 ‘쪼그만 아시아나 뱅기’에 몸을 실었다. 이륙직전, 비행기에 안에서도 놓지 못한 전화기. “우와~ 비행기 안 에서도 통화가 되는 구나. 신기해.” “잘 갔다 올게요. 걱정 말구. 수요일 저녁에 통화해요. 알았지?” “응, 밥 잘 먹고, 조심히 다녀와.” 애인의 목소리에 고마워하며, 내내 나를 걱정할 애인에게 미안해하며, 나는 전화기를 끊었다. 캄보디아의 관광도시이자 역사도시인 씨엠립(우리나라로 치면 경주라 할까)을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 창가에 앉은 나는 내내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No picture? Three dollar! 사실 이번 여행에서 예약하고 결제도 다 한 뒤, 여행을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이 많았다. 태풍 에위니아 때문에 남부지방 날씨가 좋지 않았거니와 꿈자리가 좋지 않았다. 꿈에 비행기를 탔는데, 엉뚱하게도 내 친구가 기장이었다. 근데 비행기가 뭔가 이상하고 추락하는 느낌이 나서 조종실에 들어갔더니 친구는 비행기 운전도 안 하고 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비행기가 천천히 추락하는 걸 조작해서 비행기가 다행히 바다 위로 착륙하는(?) 그런 꿈을 꿨었다. 얼마나 걱정을 했던지, 여행 가다가 죽는 거 아닌가 싶어서 정말 ‘허벌나게’ 공포에 떨었던 출국 전의 기억이었다. 다행히, 비행기는 씨엠립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캄보디아는 도착비자여서 비자를 받는데, 비자에 붙일 사진이 캐리어에 넣어둔 것이다. 짐은 바깥에 있고, 나가려면 입국 심사를 하고 나가야하는데, 비자 없이 나갈 수는 없고, 나는 안에서 내내 발을 동동 굴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되지 않는, 그러나 되는 영어로 ‘샬라’ 거렸다. “My picture in Carrier. What can I do?" 결전의 수능에서는 4등급 밖에 받지 못한 영어 실력이지만 아무렴, 중요한 건 실전이다. 회화다. 암! 그래도 발음 하나는 자신 있다고 혀를 ‘꼬부랑거리며’ 이야기 했더니, 캄보디아 아저씨 역시 기다렸다는 듯 ‘꼬부랑거리며’ 이야기하신다. “No picture? Three dollar!" 원래 1달러씩 팁을 받는데, 3달러를 내라는 것. 나는 얼떨결에 지갑에서 3달러를 꺼내줬다. 그걸로 끝났다. 그 중요한 비자에 사진도 없는데 3달러면 통과라니! 나야 별 탈이 없어서 다행. 역시 돈이 좋긴 좋은 건가 보다. 무사히 비자를 받고, 입국 심사를 하고, 짐을 찾고 공항을 나왔다. 후덥지근한 날씨, 키 큰 야자수, 조용한 도시- 아, 캄보디아에 왔긴 왔나보다. 가이드를 만나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해서 제일 눈에 띈 것은 호텔 시설도 아니고, 호텔 벽에 붙은 도마뱀이었다. 오기 전에 읽은 도올 김용옥님의 책에서 본 그 ‘도마뱀’이었다. 도마뱀 모양의 젤리처럼 생긴, 그러나 도마뱀은 내 손가락 두개 만한 크기에 수술용 고무장갑 같은 색깔에 네 다리를 양쪽으로 펼치고는 벽에 ‘딱’ 달라 붙었다. 그 와중에도 까만 눈은 어찌나 귀엽던지, 함께 여행하게 된 초등생 꼬마녀석들은 징그러워했지만, 나는 너무나 신기하고 귀여워서 내내 입을 ‘헤’ 벌리고 도마뱀을 보았다. “귀엽지?” 노디의 표정은 어둡다. 별로 귀엽지 않나부다. 아무렴, 내 눈에 귀여우면 그만이다. 앙코르를 만나다 아침 5시 30분에 눈을 떴다. 한국 시각으로 치면 7시 30분이니까 그다지 늦은 시간은 아닌데, 그래도 어제보다 두 시간을 더 적게 잔 것이므로 매우 피곤했다. 6시 30분까지 로비로 모이라고 했으니까, 근데 왜 이렇게 관광을 일찍 하냐구요? 캄보디아는 열대지방이다. 우리나라의 최고 더운 여름 날씨보다 더 더운 날씨가 이 나라의 보통 날씨다. 그래서 아침 일찍 서둘러야, 덥기 전에 ‘시원할 때’ 둘러볼 수 있다. 첫날부터 5분 늦어버린 우리는 가이드 아저씨한테 ‘딱’ 걸리고 말았다. 에고, 다음부터는 안 늦을 게요. 차 안에서, 가이드 아저씨의 설명을 들으며 앙코르 톰으로 향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앙코르 남문. 나가의 신 앞에서 우유 바다 휘젓기를 하며 악신과 선신들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책에서 볼 때는 무지 커보였는데 그래서 2~3미터는 될 줄 알았는데, 내 키보다 조금 큰 석상이었다. 내 상상했던 것보다 작아서 조금 실망을 했다. 이리저리 훼손되고 머리는 통째로 잘려져 나간 석상들이 안쓰럽기도 했는데 아무렴 그것도 다 역사 아닐까. 코끼리 한 마리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만든 남문을 지났다. 제일 먼저 간 곳은 바이욘 사원이었다. 우리나라 석굴암 본존불의 그 은근한, 마애 삼존불의 그 은근한 미소가 있다면 캄보디아에는 바이욘의 미소가 있었다. 기분 좋을 때 보면 기분 좋게, 기분 나쁠 때 보면 기분 나쁘게 보인다는 그 바이욘의 미소. 다행이 내게는 기분 나쁜 미소로 보이지 않았다. 그냥 은근하게, 신비롭게 마주했다. 바이욘 사원에서 기억 남는 것은, 벽에 새겨진 부조를 본 일이었는데, 아쉽게도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쉽지만 그 장면이다. 전쟁과 관련하여 수많은 장면들이 있었는데, 그 중 일부에 불과했던 그 부조는 이랬다. 전장에 나가는 남편이 뒤를 돌아본다. 그의 부인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남편의 손을 꼭 잡는다. 들리지는 않지만, 내게로 들리는 말소리. “조심히, 몸 조심 하세요.” “걱정마오, 부인.” 온 인류 공통의 정서였을 ‘사랑’이라는 그것이, 앙코르 천년의 역사를 넘어 내게로 말을 걸고 있었다. 그래, 나도 내 애인을 생각했다. 두고 온, 보고 싶은 내 애인을. 바이욘 사원을 지나 코끼리 테라스에 도착했다. 코끼리 테라스에 도착했을 때가 11시쯤. 해는 그야말로 정말 ‘미친 듯이’ 타올랐다. 가이드 아저씨는 그래도 오늘은 바람이 불어 시원하다고 얘기하는데 정말 더워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다행히 짜증까지 날 정도는 아니었는데, 기대를 했던 코끼리 테라스에 왔는데 진짜 너무나도 더워서 둘러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나는 대기하고 있던 우리들의 구세주 ‘버스’로 돌진 했다. 버스 안에서, 차창 너머로 코끼리 테라스를 감상할 뿐이었다. 아, 다시는 못 오겠지만 코끼리 테라스에 가서 코끼리 한 번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래서 코끼리랑 네 키가 더 큰지 내 키가 더 큰지 키 재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이 평평한 대지에, 나무 그늘 하나 없이 태양만 가득히, 해님만 가득히 넘실대는 이 땅에서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배가 무지 고팠는데 한 곳 더 간댄다. 바푸온 사원. 툼레이더에서 안젤리나 졸리가 영화를 찍기도 한, 자연의 거대한 힘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던 그곳에 갔다. 무너져가는 스러져 가는 사원 위로, 자연이 거대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몇 미터나 되는지, 얼마나 됐는지 가늠조차 하기 힘든 나무들이 사원을 덮고 있었다. 그 나무들은 물을 찾아서 라면 어디든 뿌리를 내린다 했다.(아쉽게도 나무 이름은 생각이 안 난다) 그야말로 나무를 보고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마치 그 커다란 뿌리가 움직여서 영화에서 처럼, 나를 휘익 감아서는 들어올릴 것만 같았다.

저 거대한 뿌리를 보라!, 바푸온 사원
자꾸만 목이 메이다 점심은 평양냉면 식당에서 먹었다. 도올의 책에서 ‘평양냉면’에 관한 언급이 있어서 관심 있게 읽고, 나도 혹 캄보디아 가면 그 식당에 꼭 들르게 되길 바랐는데 정말 들르게 되자, 나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탄성을 질렀다. 오예! 허나, 캄보디아 거리 한복판에서 만난 ‘평양냉면’이라는 간판은, 그것도 ‘평양’이라는 글씨는 어딘가 기분이 ‘참’ 묘했다. 식당 안에 들어가니 북한 최고의 엘리트 여성이라는 북한, 아니 북조선 아가씨들이 우리를 향해 인사했다. 짙으면서도 옅은 화장에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그들은 낭랑한 목소리를 터뜨렸다. “오소 오십시오.” 아…. 준비된 한정식 이외에 더 먹고 싶은 게 있다면 개인비로 계산을 해야 했다. 평양냉면식당에 왔는데 평양냉면을 안 먹을 수는 없지. 노디와 하나 사서 둘이 나눠 먹기로 하고 평양냉면을 시켰다. 평양냉면을 기다리며, 한식을 천천히 먹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반갑숩네다~ 반갑숩네다~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숩네다~” 북조선 아가씨들의 공연이 시작됐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노래 부르는 ‘언니’들의 공연을 넋 나간 채 보았다. 조금 보다 다시 밥을 먹는데 계속 노래가 들려왔다. 아니, 그 노랫말이 쉼표가 하나씩 찍힌 채 칼날처럼 내 가슴팍에 들어와 꽂혔다. 반.갑.습.니.다.동.포.여.러.분.형.제.여.러.분.이.렇.게.만.나.니.반.갑.습.니.다. 순간 …… 목이 메었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코끝이 시큰했다.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밥 대신 가사를 곱씹어 넘겼다. 그러나 그마저도 쉬이 되질 않았다. ‘동포여러분 형제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맨 처음 저 노래를 들었던 날 얼마나 웃었던가. 촌스런 북조선 노래다, 가사가 저게 뭐냐, 유치하게.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던 그 노래가 이 낯선 캄보디아 땅에서, 북조선 언니의 목소리를 통해 나올 때, 나는 한국에서의 ‘그 느낌과 생각들’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동포라는, 형제라는, 한 핏줄이라는 ‘그 따위’ 수식어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북조선 사람들과 남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슬펐다. 왜? 도대체 누가 이 나라를 둘로 갈라놓은 것일까, 왜 우리는 이렇게 ‘한반도’가 아닌 낯선 ‘캄보디아’라는 곳에서 ‘한 겨레’를 마주해야하는 것일까 온갖 의문이 밀려들어왔다. 동아리에서 6·25나 통일에 관한 숱한 교양들이 나를 짓누를 때, 그때마다 나는 도망갔다. 통일은 너무나도 멀었다. 대학생의 힘으로 통일은 어려웠다. 미군을 몰아내는 것은 더더욱 그랬다. 그랬던 나는 강력히, 너무나도 강력히 ‘통일’을 생각했다. 이는 내가 ‘하나 된 강력한 한국’을 바라기 때문도 아니고, 이산가족의 한을 풀기 위해서도, 분단으로 손실되는 그 숱한 무엇 때문도, 이 땅에서 미군을 몰아내기 위함도 아니다. 다만 이 상황 자체가 너무나도 아이러니하기에 ‘통일’을 생각한 것이었다. 우습지 않은가. 차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개성을 두고, 거기서도 먹을 수 있는 평양냉면을 두고, 거기서도 마주할 수 있는 ‘언니’들을 두고, 여섯 시간을 걸려 캄보디아에 와서, 낯선 이 열대우림의 캄보디아에 와서 7000원이 아닌 7달러를 주고 평양냉면을 먹는 것이, ‘언니’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도, ‘동포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라는 노래에 목이 메이는 것이 너무나도 우스웠다. 마음 속은 온갖 의문과 생각으로 가득 차고, 그래도 뒤이어 나온 평양냉면은 맛있었다. 남한의 냉면과는 전혀 다른 맛이지만, 그냥 나는 이맛이 좋았다. ‘평양맛’이 그냥 좋았다. ‘그냥’ 아쉬움을 달래고, 식당을 나왔다. 국어시간에 들었던 ‘북한은 가나다라 순서에서 <아>가 가장 뒤에 있다’는 선생님의 그 가르침이 진실인지 ‘언니’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물어보지 못하고 식당을 나왔다. 기회가 되면 다시 또 올 수 있길, 혹 가이드 아저씨가 ‘제일 맛있었던 식당이 어디였어요? 거기로 밥 먹으러 가겠습니다’라고 물으면 제일 큰 목소리로 ‘평양냉면’이라고 대답해서 다시 오고 말리라 주먹을 꼭 쥐고 다짐하며 호텔로 향했다. 히히. 계속.. ^^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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