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서울의 한 영화관에서 피터 슈라이어 당시 기아차 디자일총괄 부사장이 대형 세단 케이(K)9의 디자인을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도화지에 K9의 각 부문을 하나하나 직접 그리면서 K9 디자인의 특징을 소개했다. 기아자동차 제공
직선·단순미 중점 K시리즈 이끌어
‘곡선미’ 강조 현대차 변화 관심
‘곡선미’ 강조 현대차 변화 관심
6년 전,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여러 차례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기아차 대표이사였던 그가 본 기아차의 최대 약점은 ‘그저 그런 디자인’이었다. 그는 삼고초려 끝에, 폴크스바겐·아우디에서 디자인 총괄을 지냈고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던 피터 슈라이어 영입에 성공했다.
기아차 디자인 총괄부사장을 맡은 슈라이어는 ‘슈라이어 라인’이라고 불리는 호랑이코 모양의 라디에이터 그릴을 앞세워 중구난방이던 기아차 디자인의 통합·정리에 나섰다. 기아차 고속 성장의 견인차가 된 K시리즈는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정의선 부회장도 ‘경영 능력 검증’ 이력에 슈라이어 영입을 자랑스럽게 올릴 수 있었다.
지난달 말 있었던 현대차그룹 인사에서 기아차 사장으로 승진한 슈라이어가 13일 현대·기아차 총괄사장직에 올랐다. 현대차그룹은 보도자료를 내어, “현대차와 기아차, 각 사의 디자인 부문간 조율을 통한 시너지 극대화와 양사 간의 디자인 차별화를 통한 브랜드 혁신 강화를 위해 현대·기아차 디자인 총괄사장직을 신설했다”고 인사 배경을 설명했다.
기아차뿐 아니라 자동차업계에선 기아차의 고질적 병폐였던 디자인 부문의 낮은 자율성이 슈라이어 영입 이후 상당부분 높아진 것을 최대 효과로 꼽아왔다. 이에 따라 슈라이어의 총괄사장 임명을 계기로 현대·기아차 디자인 부문의 자율성이 지금보다 크게 확대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기아차 디자이너 출신인 한 인사는 “2000년대 초반 디자인팀이 최고경영진을 대상으로 신차 디자인 시안 설명회를 했는데, 정몽구 회장이 설명회 중간에 아무 말 없이 나갔고 그 뒤 디자인을 처음부터 새로 작업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슈라이어가 영입된 이후 디자인팀의 경영진 눈치보기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슈라이어도 2010년 7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하계포럼에서 기자와 만나 “최고경영진이 자동차 디자인의 중요성과 가치를 인식하고 디자인센터에 자율성을 부여한 결과”라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슈라이어 사장이 서로 다른 디자인 철학을 갖고 있는 현대차와 기아차의 차별성을 어떻게 조율하면서 변화시켜나갈 것이냐에 벌써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다. 슈라이어 사장은 그동안 기아차에 단순미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는 이를 ‘직선의 단순함’이라고 정의했다. 반면 2009년 와이에프(YF)쏘나타 때부터 현대차의 디자인 철학으로 정리된 ‘플루이딕 스컬프처’는 상대적으로 곡선미와 화려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와 다른 관측도 나온다. 현대차 관계자는 “슈라이어 사장이 현대·기아차의 디자인 변화 방향과 관련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또 현대차 디자인을 총괄해온 오석근 부사장도 유임됐다. 이런 점들에 비춰볼 때, 당장 두 회사의 디자인 통합 작업이 이뤄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말했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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