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섭 경제부 정보통신전문기자
김재섭 기자 @어바인통신
귀국을 며칠 앞두고 케이블텔레비전, 초고속인터넷, 전기를 끊으려고 각 업체로 전화를 걸었다. 기계가 전화를 받았다. 원하는 기능에 해당하는 번호를 누르란다. 전화를 받는 기계가 나의 미국어 실력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탓에 처음부터 다시 하기를 반복한 끝에 직원과 연결되는 단계까지 갔는데, 거기서도 길게는 20분 이상 더 기다리다 끊기를 계속했다. 통화에 성공해 해지 신청을 마무리하는 데만 3시간 넘게 걸렸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통신위원회가 2006년에 접수된 민원 내용을 분석해 2005년치와 비교한 결과를 보니, 해지를 거부하거나 지연시켰다는 게 가장 많이 증가했다. 담당자를 바꿔준다고 해놓고 30분 이상 통화대기음만 들려줬다는 사례도 있다. 미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긴 언제부터인가는 컴퓨터를 사용하거나 인터넷을 이용하다 장애가 발생해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면, 전화로 컴퓨터를 켜라고 한 뒤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고 해 진땀 난 경험도 있다. 모르겠다고 하면 “요즘은 다 이렇게 하는데~”라고 말해 모욕감을 주기도 한다.
기업이 상품이나 서비스를 팔았으면 당연히 이용법을 가르쳐주고, 장애가 발생하면 해결해줘야 한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비자가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용하다 장애가 발생해 전화하면 직원이 달려와 해결해주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는 유지보수에 소비자 손을 빌리고 있다. 사용법 역시 스스로 깨치게 한다. 컴퓨터 사용자나 인터넷 이용자들의 경우, 유지보수를 받으려면 미리 시간을 정해 컴퓨터 앞에 대기해야 하고, 꽤 오래 업체 유지보수 담당자의 손 구실을 해야 한다.
기업들은 소비자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처럼 떠든다. 신속한 복구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유지보수 비용을 절감하려는 것일 뿐이다. 소비자 쪽에서 보면 서비스 질이 낮아졌다고 보는 게 맞다.
전문가들은 이를 “기업들이 소비자의 시간을 도둑질하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란 책에서 “기업들이 이용자들에게 무임금의 ‘제3의 직업’을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장과 가정 일로 시간 부족에 시달리는 데 이어 기업한테 시간을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이 소비자의 시간을 빼앗았으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소비자의 시간과 손을 빌리는 방법으로 유지보수 비용을 절감했으면 그만큼 상품 값이나 서비스 이용료를 내리거나 다른 부가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게 맞다. 하지만 지금의 추세는 이용자의 시간을 갈취할 뿐 대가는 치르지 않는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직접 와서 해결해주면 안 될까요?” 이렇게 해서 소비자도 기업의 시간을 빼앗아보면 어떨까.
j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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