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섭 경제부 정보통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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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나서준 덕에 깔끔하게 해결됐어요. 솔직히 국정감사를 기회로 이동전화 요금인하 요구가 거세질까 걱정했는데….”
에스케이텔레콤 관계자가 사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다. 그는 “가래로 막아야 할 일을 호미로 막을 수 있게 됐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청와대는 최근 ‘민생’을 위해 ‘사회적 약자’의 이동전화 요금인하를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청와대 발표가 있은 지 이틀도 안 돼 에스케이텔레콤이 사회적 약자 중심의 이동전화 요금인하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언론에 보도됐다. 국정감사 전에 이동전화 요금인하 문제를 매듭짓기로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대통령이 사회적 약자의 통신비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것에 딴죽을 걸 생각은 없다. 하지만 청와대, 정보통신부, 에스케이텔레콤이 어떻게 저렇게 손발을 잘 맞출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해’가 일치해야 가능하다.
이동전화 이용자와 시민단체들은 그동안 이동전화 요금을 내려 국민의 통신비 부담을 줄여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기본료와 문자메시지(SMS) 이용료 인하 및 가입비와 발신자전화번호표시(CID) 무료화 등을 요구했다. 정치권에서도 이동전화 요금인하를 요구해왔다. 국민들은 높은 통신비 부담 때문에 힘들어하는데, 이동통신 업체들은 해마다 수조원의 이익을 남겨 ‘배당잔치’를 벌이고 있는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이용자, 시민단체, 정치권이 한 목소리로 이동전화 요금인하를 요구하자, 이동통신 업체들도 속으로는 마냥 버틸 수만은 없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청와대의 갑작스런 개입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에스케이텔레콤 쪽에서 보면, 기본료를 낮추면서 통화료를 올린 ‘소량 이용자 요금제’를 내놓고 청소년 요금제와 장애인 요금제를 일부 손질하는 것으로 이동전화 요금인하를 대신할 수 있게 됐다. 아니나 다를까. 이동전화 요금인하를 요구해온 시민단체와 정치권 쪽에서 “청와대가 물타기를 했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동전화 요금인하 운동을 펴고 있는 서울와이엠시에이 시민중계실 김희경 팀장은 “대통령이 사회적 약자들의 이동전화 요금 부담에 관심을 나타낸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방향을 엉뚱하게 잡아 물타기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이동전화 요금인하는 전체 이동전화 이용자의 요구인데, 청와대가 이를 특정 이용자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김희정 의원은 대놓고 “물타기”라고 주장했다. 곧 있을 국정감사 때 한나라당 의원들이 이동전화 요금인하를 적극 요구하고 나설 것 같으니까 ‘선수’를 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이번 이동전화 요금인하에는 가입비 면제, 기본료 인하, 장기 가입자 요금할인 등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며 “국감 때 분명하게 다시 짚을 것”이라고 을렀다.
청와대의 개입과 일부 언론의 추임새로 이동전화 요금인하 대상을 ‘사회적 약자’로 줄이는 게 기정사실화하자, 이동통신 업체들이 말을 바꾸고 있다. 올 들어 이미 청각장애인 요금제를 만들고 청소년·노인 요금제를 손질한 만큼 더 손볼 게 없단다. 김재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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