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이었던 클로스터 에버바흐 와인 창고에 최고급 와인을 숙성시키는 오크통들이 즐비하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하루종일 밭에 나가 신께 바칠 포도를 경작했다. 차가운 잠자리와 금욕적 식사만 허용되는 혹독한 삶으로 수도사들의 평균 수명은 35살이었다고 전해진다. 신세계 제공
신세계, 신인 와인들 찾아
세계 주요 양조장 방문
유명 와인도 병행수입 방침
“부도덕한 마진관행 바꿀것”
세계 주요 양조장 방문
유명 와인도 병행수입 방침
“부도덕한 마진관행 바꿀것”
라인강을 따라 나지막이 펼쳐진 언덕배기로 끝없는 포도밭이 이어진다. 짧게는 40년, 길게는 100년의 바람과 태양을 기억한다는 포도나무들이다. 요즘은 푸른 눈의 독일 여인들이 꽃봉오리 솎아내기에 한창이다. 일주일 뒤면 포도꽃이 피고 연둣빛 투명한 열매가 영글기 시작한다. 독일 최대의 백포도주 산지인 라인가우 지역, ‘클로스터 에버바흐’ 와이너리가 가장 바쁜 계절이다.
국내 백화점과 대형 마트 등이 경쟁적으로 와인 품목을 늘려가는 가운데 ‘와인값 거품빼기’ 선언을 한 신세계 엘앤비가 세계 주요 와이너리를 돌며 신인 와인을 찾고 있다. 클로스터 에버바흐도 신세계가 새로 와인을 수입하기로 한 와이너리다. 신세계는 지난해 12월 와인 직수입사를 설립한 데 이어, 지난달 6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새로 수입한 와인 260종을 선보였다. 또 “유통 마진 최소화로 와인을 대중화하겠다”고 밝혔다.
신세계가 수입원가의 서너 배로 파는 게 보통인 국내 와인값의 거품을 정말로 걷어낼 수 있을까? 신세계의 발표는 ‘와인값 거품빼기’였지만, 260종 직수입 와인의 80%가 기존에 국내에 들어온 적이 없는 신인 와인이란 점에서 가격 비교 체감이 어렵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 가격 비교가 가능한 40~50종은 고가 와인들이라 ‘미끼 상품’에 가깝다는 지적(<한겨레> 5월7일치 27면)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달 28일 독일 클로스터 에버바흐를 방문한 자리에서 신세계 박찬영 상무는 “신인 와인들을 계속 발굴하는 한편 이미 수입돼 있는 유명 와인들도 병행 수입하기로 방침을 바꿨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지 않을 경우 ‘와인값 거품빼기’ 선언이 미끼상품 전략으로 비칠 수 있다는 언론의 지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며 “병행 수입이 시작되면 가격 비교가 정말로 체감돼 난리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독일 현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와인은 수입 단계에서 70%의 관세 등 통관비용이 붙어 수입원가의 170%가 되는데, 수입상들은 마진 30%를 수입원가에 대해 붙이는 게 아니라 170%가 된 가격에 대해 붙이고, 여기에 유통 단계별로 다시 30%씩 마진을 붙여 엄청난 가격 거품이 생긴다”며 “관세는 어차피 소비자가 지불하는 걸 유통업자가 대납하는 것일 뿐인데, 이런 관행은 부도덕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마트는 와인 최대 판매처인만큼 이런 마진 관행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와인값 거품빼기 결과는 여전히 지켜보아야 할 사안이지만, 신세계의 행보는 경쟁사 가격 정책에도 영향을 끼쳤다. 경쟁사들은 와인값 불신을 최소화할 방안을 새로 내놓거나 가격 거품을 뺀 신인 와인들을 잇따라 선보일 방침이다. 롯데백화점은 지난 1일 가격 변동이 심한 인기 고가 와인 100여종에 대해 정찰제인 ‘그린 프라이스제’ 시행에 들어갔다. 이런 와인들은 워낙 값이 널을 뛰어 소비자의 불신이 컸다. 롯데는 “마진을 최소화해 최대 60%까지 가격 거품을 뺀 뒤 정찰제를 시행하고 할인 행사는 연중 2~3차례만 정기적으로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도 지난달 29일부터 ‘에이치 스타일 와인’이라는 카테고리로 마진을 최소화한 와인 30여 품목을 선보이고 있다. 또 상반기 안에 현대에서만 살 수 있는 ‘에이치 오운리 와인’ 40여 품목도 선보인다. 5일부터 닷새 동안은 ‘현대 와인페어’ 행사를 진행하는데, 재고 떨이 와인이 아니라 상반기 인기 상품 100여종을 중심으로 대폭 깎아 판다.
와인은 이야기를 담는 술이다. 지인들의 대화를 풍부하게 해주고 연인들의 밀어를 달콤하게 한다. 그래서 와이너리들은 자신이 빚는 와인에도 이야기를 담고 싶어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장미의 이름>이 촬영되기도 했던 클로스터 에버바흐는 1136년 수도회 포도밭으로 출발해 천년 역사를 들려준다. 저마다 비밀스런 얘기를 간직한 와인들을 어떤 가격에 맛보게 될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라인가우(독일)/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독일 라인가우 지역 200만㎡(60여만평)에 이르는 클로스터 에버바흐 포도밭 80%에서는 화이트 와인을 빚는 리슬링 품종이 재배된다. 한 독일인이 포도꽃을 솎아주고 있다.
라인가우(독일)/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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