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발묶여…싼 업체로 쉽게 못옮겨
길게보면 요금 더 내릴기회 차단하는 셈
길게보면 요금 더 내릴기회 차단하는 셈
며칠 전 통신업계에 ‘비보’가 날아들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회원국의 이동통신 요금을 조사해 비교했는데, 우리나라가 4~5단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지난 2년 동안 다른 나라보다 요금 인하 노력을 게을리했다는 얘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는 2년마다 회원국의 이동통신 요금을 조사해 발표한다.
통신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이동통신 소비자들과 정치권이 이번 조사 결과를 근거로 더 강하게 요금인하를 압박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결합상품’을 앞세워 요금인하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려는 전략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벌써 통신업체들은 조사 결과를 애써 폄하하려 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조사는 결합상품과 망내 할인 같은 한국의 특수한 환경을 반영하지 않아, 단순 비교로 우리나라의 통신요금이 싸다거나 비싸다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 조사 결과는 방송통신위원회와 통신업체들이 결합상품의 요금인하 효과가 크다고 큰 소리 칠 때부터 이미 예견됐던 것이다. 통신업체 쪽에서 보면, 가입자들이 결합상품으로 전환하면 이동통신과 집전화는 월 기본료와 통화료, 초고속인터넷은 월 이용료 가운데 일부를 깎아줘야 해 수입 감소 요인이다. 그런데도 통신업체들은 가입자들을 결합상품에 가입시키지 못해 안달한다. ‘가족이 함께 결합상품으로 바꾸면 요금을 깎아주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며 바보 취급을 하기도 한다.
통신 결합상품이란 여러가지 통신서비스를 묶어 함께 이용하면 요금을 깎아주는 것이다. 결합상품을 이용하면 당장에는 요금이 절감된다. 하지만 좀더 넓고 길게 보면, 소비자로선 추가로 요금을 내릴 기회를 스스로 없애는 결과를 부를 수도 있다. 반대로 통신업체에는 매출의 추가 감소 위험을 줄이는 기회로 작용한다.
통신시장이 결합상품 중심으로 바뀌면, 요금 구조가 복잡해져 모든 이용자들이 골고루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요금을 조정하는 게 어려워진다. 대신 통신업체들로서는 결합상품이 요금인하 압박을 무마시키는 유효한 수단이다. 실제로 통신업체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통신요금을 20% 인하하겠다고 하자 약속이라도 한 듯 너도나도 결합상품을 앞세우며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방통위와 한목소리로 결합상품의 요금 인하 효과가 크다고 외쳤다. 결국 이 대통령의 ‘통신요금 20% 인하’ 공약은 물건너가 버렸다.
결합상품 가입자는 요금이 싼 업체로 맘대로 옮겨다닐 수 없다. 케이티가 내세우는 정액형 결합상품에는 3년 약정이 걸려 있어 중간에 해지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하고, 에스케이텔레콤은 가입기간에 따라 할인율을 높여주는 방식으로 중도 이탈을 막고 있다. 통신업체들은 가입기간이 길어질수록 마케팅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 반면 가입자는 추가로 기대할 게 거의 없다.
더욱이 통신업체들이 결합상품을 선전하면서 앞세운 수치 가운데 상당부분은 허수다. 케이티는 결합상품으로 묶인 가족 수에 따라 이동통신 기본료를 최대 50%까지 할인해준다고 선전한다. 하지만 ‘같은 집에 살고 있는 가족’이란 조건이 달려 있어, 결합상품의 실제 이동통신 회선 수가 평균 2.4회선에 지나지 않는다. 케이티 결합상품 가입자들의 이동통신 기본료 할인폭이 평균 24%에 불과하고, 그만큼 통화료 할인 기회도 적다는 얘기다. 에스케이텔레콤 결합상품의 이동통신 회선 수도 평균 3회선으로 상한선인 5회선에 크게 못미친다.
통신사업은 초기비용이 많이 드는 장치산업이다. 새 서비스를 할 때 대규모 투자로 통신망을 깐 뒤 요금을 받아 투자비를 회수하고 이익을 낸다. 따라서 초기에는 요금을 높게 잡았다가 시간이 가면서 감가상각과 이용량 증가에 비례해 낮춰가는 게 당연하다. 실제로 이동통신 요금의 경우,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소비자들의 요구로 해마다 한두차례씩 내렸다. 이동통신 업체들은 이렇게 주기적으로 요금을 내리면서도 해마다 큰 이익을 남겼다. 지금까지 통신요금 인하에는 정치권이 나서기도 했지만, 동력은 소비자들의 거센 요구였다.
김재섭 기자 jskim@hani.co.kr
김재섭 기자 j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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