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현대백화점이 서울 코엑스에서 연 프드 앤 리빙 페어 행사장에서 소비자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연합뉴스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코리아 광군제, 케이세일데이, 박싱데이….’ 백화점들이 세일 행사 명목을 빌려 연이은 ‘재고떨이’에 나서고 있다. 내수 침체로 백화점 판매가 가라앉고 입점업체 재고가 쌓이는 상황에서, 콧대 높은 백화점들마저 창고형 매장을 임대해 ‘눈물의 땡처리’를 하는 게 사실상 정례화하는 모양새다.
롯데백화점은 11일부터 20일까지 경기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롯데 박싱데이’를 진행한다고 9일 밝혔다. 이는 영국 등 유럽의 축제형 재고떨이 행사인 ‘박싱데이’(12월26일)에서 행사 이름을 본떴다. 하지만 실제 이 행사의 성격은 롯데가 올해 4월에 처음 시작한 창고형 땡처리 기획의 일환이다. 롯데는 이런 재고떨이 일정을 하반기에만 세차례 잡는 등 올해 네차례나 기획했다. 게다가 규모는 갈수록 더 커지고 있다. 4월 첫 행사에서 60억원 상당의 매출을 올린 뒤 7월엔 메르스 극복의 명분을 들어 ‘롯데 블랙 슈퍼쇼’라는 이름으로 200억원 상당의 물량을 쏟아냈다. 이어 10월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기간에도 유사한 행사를 진행했다. 네번째인 이번 박싱데이 행사엔 500억원가량의 상품을 준비했다고 하니, 4월 행사에 견줘 8배 이상 덩치가 커진 셈이다.
롯데백화점이 앞서 세차례 떨이 행사로 모두 300억원의 매출을 올리자, 초기엔 ‘유통질서 교란’을 이유로 볼멘소리를 하던 경쟁사들도 가세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11월 서울 코엑스에서 대대적인 ‘출장 세일’을 벌여 43억원의 매출을 거뒀다. 아예 제조사 차원에서 대규모 출장세일에 나서기도 한다. 크로커다일레이디 등의 브랜드를 보유한 패션그룹 형지는 오는 17~20일 서울 강남 세텍 전시장을 임대해 창고형 할인 행사를 하기로 했다.
백화점 등 국내 유통 대기업들은 재고 부담을 영업장에 입점한 협력업체가 거의 떠안는 구조여서 지금껏 대규모 재고떨이 행사가 드물었다. 하지만 지난해와 올해에 이은 매출 뒷걸음질 추세는 통상적 세일 행사로는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이란 인식이 업계 안팎에서 번졌다. 이번 롯데 박싱데이에 참여할 계획인 한 침구업체 임원은 “경기가 불안정해 생산했던 물량들이 소진되지 않고 쌓여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날씨마저 따뜻해 겨울 물건이 잘 판매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통계청의 ‘서비스업 동향 조사’를 보면 백화점 판매액은 2013년 29조8000억원에서 지난해 29조3230억원으로 오히려 1.6% 줄었다. 올해는 10월까지 23조5390억원어치를 팔았는데 지난해 23조6780억원보다 0.6% 감소한 규모다. 그나마 내수 부양 총력전을 펼쳐서 10월 판매액 신장률을 두자릿수로 끌어올린 끝에 간신히 추락을 방어한 결과다. 앞서 정부와 민간은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와 개별소비세 인하 등 내수 진작 카드를 쏟아부었지만, 벌써 소비 부양 직후 급락을 의미하는 ‘소비 절벽’ 탄식이 나오고 있다.
백화점업계가 창고형 출장세일 같은 단기적 처방에 매달리고 있지만 계속 실효성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같은 날 기획재정부는 11월 백화점 빅3의 매출액이 4.1% 늘어나는 데 그쳤다고 발표했다. 소비 부양 총력전을 펼쳤던 10월 증가 폭(17.4%)에 비해 급격히 떨어진 수치다.
이재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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