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을 인화성 위험물질로 분류해 위험 경고 표시를 부착하고 백화점 등에서 판매할 때 두께 1㎜ 이상의 철제 캐비닛에 보관하도록 한(
<한겨레> 5월22일 ‘“향수는 인화물질”, 쌓아놓고 못 팝니다’) 소방당국의 규제를 앞두고 청와대가 단속 보류 및 관련법 개정을 지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현실과 괴리된 규제 정책에 청와대가 제동을 건 셈이다. 그동안 업계는 “사실상 영업을 하지 말란 소리”라며 반발해왔다.
4일 화장품 업계 설명을 종합하면, 지난달 29일 청와대 규제 및 안전 담당부서 관계자는 대한화장품협회와 소방청 관계자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화장품협회 쪽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 화장품을 안전 캐비닛에 보관하도록 하느냐”, “화장품을 위험물 취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규제다”라고 강력하게 성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규제가 불가피하다는 소방청과 과도한 규제라는 화장품협회 쪽의 공방이 오갔고, 결국 청와대는 소방청에 “2019년 12월까지 화장품에 대해선 위험물안전관리법 적용을 보류하고 관련 부분을 개정하라”고 지시했다. 과도한 규제라는 쪽 의견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7년 3월 국회의결로 개정된 위험물안전관리법은 위험물을 제조하거나 취급하는 이들의 위법 행위 시 처벌을 강화하는 쪽으로 규제를 강화했다. 무분별한 위험물질 취급을 규제해, 대형 화재를 사전에 막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기업에겐 규제가 강화된 셈이다. 이와 함께 시행령도 전반적인 규제 강화 쪽으로 연이어 개정됐다. 소방당국은 1년여 동안의 계도 기간을 거쳐 올 7월부터 본격 단속에 나설 예정이었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는 올 1월 서울의 대형 백화점 및 마트에서 판매하는 생활화학제품 604종을 수거 조사한 뒤, “손소독제, 향수, 방향제 등 조사 대상의 51.5%가 인화·발화 물질이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 조사를 토대로, 소방당국은 각 화장품 제조 회사에서 위험물 등급 판정을 받으라는 안내문을 발송했다. 화장품 회사가 위험물 제조사가 된 것이다. 판정 비용도 품목 1개당 70만원으로 책정됐는데, 시험기관이 한국소방기술원 한 곳뿐인 데다가, 품목이 많은 업체는 실험비만 수천~수억원을 지불해야 했다. 판정을 받은 뒤 인화성 여부에 따라 경고 문구도 넣도록 했다. 포장 디자인을 다시해야할 상황이었다. 제조사뿐만 아니라, 백화점도 위험물 취급소로 분류돼, 법령에서 정한 화재 예방 철제 캐비닛에 화장품 등을 보관해야하는 처지였다. 일부 백화점은 화장품 업체 관계자를 불러 대책 회의를 열기도 했다.
취지는 공감하지만, 법의 적용 과정서, 일선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는 화장품 업계의 볼멘소리가 나왔다. 물건의 포장과 진열(디스플레이)이 중요한 화장품 산업에서 포장지에 화재 경고표시를 하고 캐비닛에 물건을 보관하고 팔라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졸지에 위험물 취급소가 된 백화점 쪽도 전전긍긍하긴 마찬가지였다. 최근 화장품 업계는 공동으로 청와대 누리집에 법 개정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을 내기도 했다.
이런 갈등 과정서 청와대가 법 적용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화장품 제조사들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먼저 그동안 진행했던 ‘위험물 판정실험’을 중단했다. 법 적용 보류가 결정되면서 등급 판정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수천만원 이상의 실험비용을 낸 일부 업체들은 “허탈하다”는 반응이다. 한 화장품 제조업체 관계자는 “실험비용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민 안전을 위한 정책이란 건 공감하지만, 과도한 규제 정책 때문에 애꿎은 업체들만 손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청와대의 조처는 최근 문재인 정부의 규제 혁신 드라이브 영향도 컸다. 최근 문 대통령은 “규제 개혁이 답답하다”며 지난달 27일 예정된 규제혁신 점검회의를 당일 취소하기도 했다. 화장품 업계도 그동안 향수나 디퓨저 등을 많이 수출하는 프랑스·미국 등의 화장품 협회와 대사관 등을 통해 정부를 간접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규제가 그대로 시장에 적용됐다면, 자칫 무역분쟁까지 불러올 수 있었던 상황에서 청와대가 결단을 내린 셈이다.
화장품 업계 관계자는 “화재 예방의 방법은 수도 없이 많을 텐데, 화장품 업계에 부담을 지우는 쪽으로만 규제를 강화하다가 역풍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며 “규제를 강화하기 전에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