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불황 연구’ 삼매경에 빠지다
경제연구소 통해 경제위기 진행과정 분석 씨름
사회경제 트렌드·산업지형·수익성 변화등 촉각
사회경제 트렌드·산업지형·수익성 변화등 촉각
“최근 들어 대공황 등 자본주의 위기를 다룬 ‘딱딱한’ 책을 몇 권 사서 틈틈이 살펴보고 있다. 예전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경영 트렌드 관련 서적에 주로 손이 갔었는데 ….” 4대 그룹의 한 경영전략 담당 임원이 들려준 얘기다. “요즘 화두는 당연히 ‘불황’ 아닌가. 과거 경험에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는지 찬찬하게 들여다보는 중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 임원 입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왔다.
■ ‘대공황 연구 프로젝트’도 진행 중 재계가 소리 없이 ‘위기’, ‘불황’ 따위의 화두와 씨름하고 있다. 마치 면벽수행하듯 ‘불황 연구’ 삼매경에 푹 빠진 꼴이다. 화장실 세면대의 물 세기를 조절하고, 점심 시간마다 사내 전등을 일제히 끄고, 무조건 이면지만을 사용하는 등 허투루 새나가는 돈을 한 푼이라도 줄이고자 발버둥치는 최전선의 기업경영 현장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주요 그룹에 속한 경제·경영 연구소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엘지경제연구소엔 얼마 전 ‘대공황 연구 프로젝트’ 모임이 조용히 꾸려졌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몇 차례 나타난 대위기 시기의 구체적인 진행과정이 어땠는지를 정리하라는 그룹 고위층의 의사가 간접적으로 전달됐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한 연구위원은 “평소와 달리 상당히 ‘하드하게’(딱딱하게) 접근하라는 주문이 있었다”며 “대략 2~3개월을 목표로 잡고, 주로 1920~30년대 대공황과 1970년대 경제위기의 진행과정을 짚어보면서 현재 상황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정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난 6월 ‘신금융자본주의’라는 패러다임을 내세워 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변화상과 대위기 가능성을 앞서 제기했던 삼성경제연구소도 금융과 실물 영역이 동시에 침체에 빠져드는 ‘복합불황’ 연구를 그 후속작업의 하나로 진행 중이다.
위기 직격탄을 맞은 금융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정중호 하나금융연구소 연구위원은 “금융위기가 실물위기를 거쳐 다시 금융부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과거 경험을 통해 긴 호흡으로 따져보자는 분위기가 내부적으로도 강하다”며, “특히 고위층에서도 대공황 등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것을 보면, 아직 뚜렷하게 그 실체가 잡히지는 않지만 현재 상황이 자본주의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진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 “위기 전후의 산업지형도를 그려라” 이 과정에서 기업들이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대공항 등 거대 경제위기를 전후한 사회경제적인 트렌드 변화상과 주요 산업 지형의 변화다. 엘지경제연구소의 한 연구위원은 “과거 초대형 경제위기의 진행과정을 보면, 대체로 철도나 자동차 등 당시로서는 ‘신산업’의 등장에 따른 과잉투자와 거품이라는 위기의 사전징후가 있었고, 위기라는 폭발과정을 거쳐 연관 산업의 재편이 빠르게 진행됐다”며, “90년대 이후 정보기술(IT) 산업의 등장과 함께 싹튼 현재의 위기도 그에 버금가는 후폭풍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주요 업종의 시장상황과 인수·합병(M&A) 물결은 기업들이 가장 신경을 쓰는 대목이다. 인수·합병 분야 전문인 한 외국계 컨설팅회사 임원은 “최근 국내 10대 그룹 가운데 한 곳으로부터 대공황과 70년대 위기 전후 주요 업종의 수익성 변화와 인수·합병 성공 및 실패 사례를 분석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며 “현재의 위기를 대하는 기업들의 고민의 폭과 깊이를 가늠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 ‘대공황’ 다룬 책 판매 늘어 이러다 보니, 불황이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짚어보려는 직장인 등 일반인들도 차츰 늘고 있다. 얼마 전 국내의 몇몇 사회·경제학계 연구단체들이 최근의 금융위기를 주제로 공동으로 개최한 토론회에서는 보기 드문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문 연구자뿐 아니라 일반 직장인 등 200여명이 넘는 청중이 하루종일 자리를 지켜 주최측조차 “유례없는 일”이란 평가를 내렸다. 장시복 경상대 연구교수는 “얼마전 한 지방 대학에서 학생과 지역사회 대상으로 자본주의 위기와 관련된 특강을 한 적이 있었는데 예상외로 무려 300명이 넘게 왔더라. 진짜 관심사야 다를 수 있다 쳐도, 마치 80년대 중반의 대학가를 보는 듯했다”고 말했다.
출판계에 몰아친 극심한 불황 속에서 <… 대공황>, <… 금융위기> 따위의 제목을 단 책들이 평소보다 판매량이 늘어난 것도 역설적이다. 최근 대공황기 세계경제를 다룬 책을 번역한 박복영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극소수 전문 연구자들이나 볼 법한 어려운 책인데다 2000년에 나온 책의 개정판을 다시 낸 것인데, 의외로 판매량이 20~30% 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요즘 상황은 사람들이 무언가 근본적인 허기를 느끼는 듯한 분위기”라고 말했다. 최우성 기자 morgen@hani.co.kr
출판계에 몰아친 극심한 불황 속에서 <… 대공황>, <… 금융위기> 따위의 제목을 단 책들이 평소보다 판매량이 늘어난 것도 역설적이다. 최근 대공황기 세계경제를 다룬 책을 번역한 박복영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극소수 전문 연구자들이나 볼 법한 어려운 책인데다 2000년에 나온 책의 개정판을 다시 낸 것인데, 의외로 판매량이 20~30% 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요즘 상황은 사람들이 무언가 근본적인 허기를 느끼는 듯한 분위기”라고 말했다. 최우성 기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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