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중심부 차링크로스에 있는 대형서점 블랙웰에서는 주문형 출판시스템 ‘에스프레소 북머신’이 지난 9월부터 가동돼, 누구나 5~10분이면 절판된 책이나 저작권이 만료된 책을 즉석에서 인쇄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은 독서 환경과 출판산업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주문형 즉석출판시스템을 시행하고 있는 영국 런던의 한 대형서점과, 경기도 파주 출판도시에서 열린 출판문화 국제포럼을 통해 디지털 기술이 적용된 출판 현실과 미래를 살펴봤다.
#1. 영국 런던 시내
런던 시민들은 절판돼 구할 길 없던 책을 에스프레소 커피 한잔 뽑는 것처럼 빠르고 간편하게 손에 넣는다. 런던 중심부 차링크로스에 있는 블랙웰서점은 지난 9월 주문형 출판시스템인 ‘에스프레소 북 머신’을 도입해, 고객이 원하는 책을 현장에서 만들어 팔고 있다. 100만권이 넘는 도서 목록 중에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대니얼 디포의 <캡틴 싱글턴> 책을 주문하자, 눈 앞에서 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파일을 내려받은 뒤 고속 양면복사기를 통해 인쇄된 종이가 다발로 묶여 제본이 되고 알맞게 재단이 되었다. 기계 밖으로 ‘따끈따끈한’ 새 책이 만들어져나오는 데는 5분가량 걸렸다. 사진 등 인쇄 상태를 비롯한 전체적 품질은 새책과 별 차이가 없었다. 값은 각각 5파운드(약 1만원), 7파운드90센트(약 1만5000원)였다.
책제목 클릭하면 눈앞서 인쇄
동네서점도 경쟁력 확보 가능 블랙웰서점에서 에스프레소 북머신을 운영하는 리언 더피시는 “하루 평균 60여권 정도를 제작한다”며 “현재 500여권의 주문이 밀려 있다”고 말했다. 더피시는 “대부분 주문이 온라인으로 이뤄지고, 90%는 선물 등의 용도로 자신만의 책을 만들려는 단독출판 수요”라며 “한 무명작가는 최근 자신이 쓴 소설책 3종을 60권씩 제작해 스스로 팔고 있다”고 말했다. <타임>이 2007년 올해의 발명품으로 선정한 에스프레소 북머신은 현재 ‘잉그램 라이트닝소스’라는 회사가 저작권을 관리하는 100만권의 책은 물론, 저작권이 만료된 도서도 즉석에서 출판한다. 또 주문자가 저작권자인 경우에도 즉석출판이 가능하다. 내년 초엔 구글의 도서 데이터베이스 수백만권과 연계될 예정이다. 디지털화된 도서 데이터베이스가 이 기계와 연결되면, 절판된 책이 생명을 얻는 것은 물론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이 지배하던 도서 유통구조도 달라진다. 2억원 수준인 이 기계를 갖춘 동네서점은 세계 어떤 도서관이나 대형서점보다 많은 종류의 책을 출판할 수 있다. 블랙웰서점의 마케팅책임자 필 제이미슨은 “출판역사에서 구텐베르크 이후 가장 큰 변화가 될 수 있으며, 작은 동네서점이 아마존닷컴이나 대형서점과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출간되는 책이 증가해 절판도서가 늘어나고, 독자의 취향이 다양해지는 현실에서 가치가 높은 기계다.
#2. 경기도 파주의 한 국제행사
지난 19~20일 파주출판도시에서 열린 ‘제4회 파주북시티 국제출판포럼’은 ‘책의 진화와 디지털출판의 미래’를 주제로 삼았다. ‘아마존 킨들’의 성공 이후 국내외에서 전자책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지만, 국내 출판인들에게 디지털 환경은 기회보다 위기로 여겨졌다.
출판계, 기회보다 위기로 여겨
기존 출판생태계 붕괴 우려 커 실제로 국내에서 일찌감치 전자책 제작에 나섰던 북토피아의 실적은 초라하다. 북토피아는 야심차게 12만권의 책을 디지털화했지만 이 가운데 10%만 팔리고 90%의 책은 한 권도 팔지 못한 채 무너졌다. 출판계는 1999년 온라인 서점이 등장한 뒤 10년간 전국에서 5000여곳의 서점이 사라진 것으로 파악한다. 온라인에서 독자는 할인과 마케팅 때문에 베스트셀러 위주로 구입하고, 자본력과 마케팅과 결합한 인기작가의 소설만 팔리는 블록버스터현상이 출판생태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출판계는 엠피3와 웹하드 이후 음반과 영화산업이 겪고 있는 수난이 남의 얘기가 아니라고 본다. 포럼에서 전자책 환경을 바라보는 국내외 발제자의 인식 차이는 컸다. 국내 출판업계의 한 발제자는 “저작권자가 전자책 환경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퀸즈랜드작가센터 대표 케이트 엘섬은 “애플 아이튠즈의 성공에서 보듯, 저작권자들로부터 권리를 사들여 대행하는 사업자나 플랫폼 제공자의 역할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디지털 출판에 적극적인 미국의 대형출판사 사이먼앤슈스터의 캐롤린 리디 대표는 “회사 전체가 디지털을 우선시하고 있다”며 2만여종의 책을 전자책으로 만든 성과를 발표했다.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기획담당 편집장 앤드류 앨버니스는 “한국의 한 출판사 사장이 ‘할아버지로부터 출판사를 물려받았지만 이젠 내 두 자녀도 부양하기 힘든 현실로 바뀌었다’고 개탄했다”며 “출판업이 위기인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 당시의 사업방식이 더이상 지금 시대에 통하지 않게 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미래학자인 제임스 데이터 하와이대 교수는 포럼 폐막연설에서 “출판업계에도 쓰나미와 같은 디지털혁명이 닥쳐오는데 이를 간과한다면 휩쓸려 간다”고 경고하며 “유일한 대안은 파도의 힘을 인정하고 서핑을 익혀 파도를 타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런던·파주/글·사진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동네서점도 경쟁력 확보 가능 블랙웰서점에서 에스프레소 북머신을 운영하는 리언 더피시는 “하루 평균 60여권 정도를 제작한다”며 “현재 500여권의 주문이 밀려 있다”고 말했다. 더피시는 “대부분 주문이 온라인으로 이뤄지고, 90%는 선물 등의 용도로 자신만의 책을 만들려는 단독출판 수요”라며 “한 무명작가는 최근 자신이 쓴 소설책 3종을 60권씩 제작해 스스로 팔고 있다”고 말했다. <타임>이 2007년 올해의 발명품으로 선정한 에스프레소 북머신은 현재 ‘잉그램 라이트닝소스’라는 회사가 저작권을 관리하는 100만권의 책은 물론, 저작권이 만료된 도서도 즉석에서 출판한다. 또 주문자가 저작권자인 경우에도 즉석출판이 가능하다. 내년 초엔 구글의 도서 데이터베이스 수백만권과 연계될 예정이다. 디지털화된 도서 데이터베이스가 이 기계와 연결되면, 절판된 책이 생명을 얻는 것은 물론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이 지배하던 도서 유통구조도 달라진다. 2억원 수준인 이 기계를 갖춘 동네서점은 세계 어떤 도서관이나 대형서점보다 많은 종류의 책을 출판할 수 있다. 블랙웰서점의 마케팅책임자 필 제이미슨은 “출판역사에서 구텐베르크 이후 가장 큰 변화가 될 수 있으며, 작은 동네서점이 아마존닷컴이나 대형서점과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출간되는 책이 증가해 절판도서가 늘어나고, 독자의 취향이 다양해지는 현실에서 가치가 높은 기계다.
디지털 기술은 독서 환경과 출판산업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주문형 즉석출판시스템을 시행하고 있는 영국 런던의 한 대형서점과, 경기도 파주 출판도시에서 열린 출판문화 국제포럼을 통해 디지털 기술이 적용된 출판 현실과 미래를 살펴봤다.
기존 출판생태계 붕괴 우려 커 실제로 국내에서 일찌감치 전자책 제작에 나섰던 북토피아의 실적은 초라하다. 북토피아는 야심차게 12만권의 책을 디지털화했지만 이 가운데 10%만 팔리고 90%의 책은 한 권도 팔지 못한 채 무너졌다. 출판계는 1999년 온라인 서점이 등장한 뒤 10년간 전국에서 5000여곳의 서점이 사라진 것으로 파악한다. 온라인에서 독자는 할인과 마케팅 때문에 베스트셀러 위주로 구입하고, 자본력과 마케팅과 결합한 인기작가의 소설만 팔리는 블록버스터현상이 출판생태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출판계는 엠피3와 웹하드 이후 음반과 영화산업이 겪고 있는 수난이 남의 얘기가 아니라고 본다. 포럼에서 전자책 환경을 바라보는 국내외 발제자의 인식 차이는 컸다. 국내 출판업계의 한 발제자는 “저작권자가 전자책 환경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퀸즈랜드작가센터 대표 케이트 엘섬은 “애플 아이튠즈의 성공에서 보듯, 저작권자들로부터 권리를 사들여 대행하는 사업자나 플랫폼 제공자의 역할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디지털 출판에 적극적인 미국의 대형출판사 사이먼앤슈스터의 캐롤린 리디 대표는 “회사 전체가 디지털을 우선시하고 있다”며 2만여종의 책을 전자책으로 만든 성과를 발표했다.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기획담당 편집장 앤드류 앨버니스는 “한국의 한 출판사 사장이 ‘할아버지로부터 출판사를 물려받았지만 이젠 내 두 자녀도 부양하기 힘든 현실로 바뀌었다’고 개탄했다”며 “출판업이 위기인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 당시의 사업방식이 더이상 지금 시대에 통하지 않게 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미래학자인 제임스 데이터 하와이대 교수는 포럼 폐막연설에서 “출판업계에도 쓰나미와 같은 디지털혁명이 닥쳐오는데 이를 간과한다면 휩쓸려 간다”고 경고하며 “유일한 대안은 파도의 힘을 인정하고 서핑을 익혀 파도를 타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런던·파주/글·사진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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