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SK, 사전정리 안돼 혼란 자초
LG, 오랜 경영수업으로 승계 순조
총수 와병 삼성은 중간 수준
‘잡스 병가뒤 팀쿡 체제’ 애플과 대조
LG, 오랜 경영수업으로 승계 순조
총수 와병 삼성은 중간 수준
‘잡스 병가뒤 팀쿡 체제’ 애플과 대조
이건희 회장의 장기입원으로 삼성의 ‘총수 공백’ 사태가 길어지고 있다. 이는 현대·에스케이·엘지 등 다른 4대 그룹들도 과거 총수의 와병 사태를 맞았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4대 그룹은 후계구도의 사전정비 여부나 후계자 경영수업 상태에 따라 총수 와병 이후 경영 혼란을 겪은 곳과, 차기회장 체제로 연착륙에 성공한 곳으로 갈렸다.
이 회장은 지난 5월10일 심장마비로 입원한 지 석달째를 맞고 있으나 병세가 얼마나 위중한지, 회복 가능성은 있는지, 회복되더라도 경영 복귀가 가능한지 등 핵심 사안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성 미래전략실은 13일 “이 회장의 건강이 상당히 호전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구체적인 병세나 치료 상황에 대해서는 “프라이버시가 있고 오해를 부를 수 있어 자세히 얘기할 수 없다”고 답변을 피했다.
삼성은 이 회장 자녀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옛 에버랜드) 사장의 3세 후계구도에 대해서도 일체 함구하고 있다. 이 회장의 건강과 후계구도에 대한 시장의 의문이 커지는 이유다. 지난 11일에는 삼성 고위 임원들의 삼성병원 집결설 및 이건희 회장 위독설이 퍼져 확인 소동이 벌어졌다. 결국 사실무근으로 드러났지만, 삼성의 불확실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삼성·현대·에스케이·엘지 등 4대 그룹이 총수의 와병 이후 경영 승계 과정에서 겪은 경험을 비교한 결과 공통점은 모든 총수들이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지 않은 것이었다. 삼성 이 회장은 1999년 림프절 암 진단 이후 지속적으로 건강이상설에 휩싸였고, 지난해 여름에는 한때 위독설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경영에서 물러난 지 2년 만인 2010년 다시 복귀한 이후 출근 횟수를 늘리는 등 경영에 더 매진했다.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은 타계 열달 전인 2000년 5월 정몽구 현대차 회장,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과 함께 3부자 동반 퇴진 선언을 했으나, 석달 전인 그해 3월 두 아들 간에 ‘왕자의 난’이 벌어졌을 때 이미 치매 증세를 보였다. 에스케이 최종현 회장도 타계하기 1년반 전인 1997년 봄에 폐암 발병을 발견하고 수술을 받은 뒤에도 주위의 만류를 마다하고 마지막까지 경영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엘지그룹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도 1969년 12월 뇌종양으로 작고하기 다섯달 전부터 병원에 입원했으나, 사망 보름 전까지 경영 현안을 직접 챙겼다.
후계구도 사전정리와 후계자 경영수업 수준은 그룹별로 차이를 보인다. 현대와 에스케이는 총수 와병에도 불구하고 후계구도 사전정리나 후계자 경영수업을 제대로 못해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분쟁이나 혼란을 겪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치매 상태였던 2000년 3월까지도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불안한 공동회장 체제를 방치하다가 결국 ‘왕자의 난’을 자초했다.
최종현 회장도 친자녀들과 창업주이자 친형인 고 최종건 회장의 자녀들 간 후계구도 정리를 제대로 못했다. 이는 결국 그의 사후 에스케이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5년간 전문경영인인 손길승 그룹회장과 오너인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의 파트너십 체제로 운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최태원 회장의 그룹 전반에 대한 본격적인 경영수업도 부친의 폐암 발병 사실을 알기 직전인 1997년 1월 지주회사 격인 유공의 상무를 맡으면서 시작될 정도로 늦었다.
반면 엘지는 엄격한 장자승계 가풍에 따라 이미 장남인 구자경 회장이 후계자로 확고하게 인식됐다. 또 구자경 회장은 부친 밑에서 2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경영수업을 거쳤다.
삼성의 후계구도 정리와 후계자 경영수업은 현대·에스케이와 엘지의 중간 수준이다. 삼성의 승계구도는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중심이라는 인식이 그룹 안팎에 어느 정도 자리잡고 있지만, 두 여동생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이서현 제일모직(옛 에버랜드) 사장이 여전히 경쟁 상대로 거론된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 상무보를 맡은 2001년 이후 14년이라는 비교적 긴 기간 동안 부친 밑에서 경영수업을 했다.
한국 재벌 총수들이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경영에서 물러나지 않고, 후계구도 정리와 후계자 경영수업을 미루다 혼란을 자초한 것은 선진국 주요 기업들과 많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애플은 최고경영자인 스티브 잡스가 2011년 초 세번째로 발병하자 바로 병가를 내고 최고운영책임자인 팀 쿡 대행체제로 전환해 경영 공백을 차단했다. 가족소유 경영으로 유명한 독일 히든챔피언은 총수들이 생전에 경영 2선으로 물러나고, 엄격한 선발 과정과 경영수업을 거친 후계자에게 최고경영자 자리를 넘긴다. 경제개혁연대의 김상조 소장은 “이건희 회장이 그동안 삼성의 최종 의사결정권자였고, 더구나 최근 삼성전자는 물론 다른 계열사 실적까지 안 좋은 상황에서, 회사와 주주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회장의 건강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프라이버시로 치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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