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이후 분기별 소비자물가 상승률 추이
고령화와 출산율 하락 등으로 인해 돈을 풀어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구조적 저인플레이션(저물가)’ 현상이 국내 경제에 고착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물가 하락 압력이 지속적으로 커지면서 한국은행은 새 물가안정목표를 현재 2.5~3.5%보다 낮춰 잡을 가능성이 커졌다.
30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인플레이션 보고서’를 보면, 국내 ‘추세 인플레이션’은 2000년대 줄곧 3%대를 유지하다가 2012년 3분기에 2%대로 주저앉은 뒤, 지난해 1분기 1% 초반까지 떨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추세 인플레이션’은 기존 소비자물가에서 단기적으로 물가에 충격을 주는 요인을 제거한 것으로, 물가의 큰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살피는 경제 지표다.
추세 인플레이션의 하락세는 2012년 3분기 국내 소비자물가가 전년동기대비 1%대로 내려앉은 뒤, 최근까지 한차례도 2%대를 회복하지 못한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한은이 2012년 기준금리를 연 3.25%에서 최근 연 1.50%까지 내리면서 돈을 풀어왔지만, 물가는 정반대로 갔던 셈이다. 같은 기간 시중 통화량(광의통화·M2 기준)도 1800조원대에서 2100조원대로 300조원 가까이 늘었다.
최창호 한은 조사국 차장은 보고서에서 “통화 완화정책에도 경기 침체와 저물가 현상이 지속되는 데는 통화정책 외에 다른 요인이 물가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며 “금융위기를 전후로 노동시장 이중구조화, 자영업 환경의 악화, 기업-가계 간 소득불균형 확대 등으로 가계의 소득기반이 약화된데다 인구고령화 진전, 가계부채 누증 등으로 소비여력이 제약되면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완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한 예로, 한은이 1995~2014년 중 한국, 캐나다 등 21개국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를 보면, 총인구 대비 65살 인구 비중이 많아질수록, 인구증가율이 낮을수록 인플레이션이 유의미하게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은 이날 발표한 보고서에서 “국내 내수 부진과 농산물 가격 하락, 국제 유가 하락과 함께 우리 경제 구조 변화가 겹쳐 저물가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 적정 물가상승률 수준을 분석하고 있다”고 밝혀, 올 하반기 발표하는 물가안정목표를 기존 2.5~3.5%보다 낮춰 잡을 가능성을 내비쳤다.
한은은 또 이번 보고서에서 도시가스, 전기료, 교통비 등 공공요금이 소비자물가에 미치는 영향도 분석했다. 도시가스 요금 또는 전기료가 10% 낮아지면, 이들이 각각 전체 물가를 0.45%포인트씩 떨어뜨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같은 조건에서 수도요금이 0.07%포인트, 열차요금은 0.02%포인트 물가 하락의 요인이 됐다.
과거에는 물가 상승이 둔화될 때 공공요금을 올렸지만, 2012년 이후에는 물가와 공공요금이 같이 하락하는 ‘동조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최강욱 한은 물가동향팀 과장은 “저물가 상황에서 공공요금 인상을 제약하면 서민 생계 부담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물가가 크게 상승했던 2010~2011년 당시 공공요금 인상률을 낮춰 물가 상승을 억제했고, 최근 장기 저물가 상황에서는 도시가스 요금 등이 크게 낮아지면서 가계 부담을 줄이는 구실을 했다. 하지만 공공요금 인상이 억제되면서 공기업의 재무건전성을 악화시키는 역효과도 지적되고 있다.
홍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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