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회장이 2일 두산그룹 회장직을 조카인 박정원 ㈜두산 지주부문 회장에게 물려준 것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다. ‘형제 경영’이 가풍으로 자리잡은 두산그룹에서 박정원 회장은 오너 일가 4세 가운데 가장 연장자로, 경영권을 물려받을 1순위로 꼽혀왔기 때문이다. 박용만 회장은 지난해에도 회장직 사퇴를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회장은 이날 ㈜두산 이사회에서 “오래전부터 그룹 회장직 승계를 생각해왔는데 이사(등기임원) 임기가 끝나는 올해가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생각으로 지난 몇년간 업무를 차근차근 이양해왔다”고 밝혔다.
재계 순위 10위(2015년 기준)인 두산그룹은 박두병 초대 회장의 뜻에 따라 3대부터 형제들이 돌아가며 회장을 맡는 ‘형제 경영’을 해왔다.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은 1981~1991년과 1993~1996년, 차남인 고 박용오 성지건설 회장이 1997~2004년 그룹 회장직을 맡았다. 그러다 2005년 3남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이 그룹 회장으로 추대되자, 고 박용오 회장은 오너 일가의 비리 내용을 담은 진정서를 검찰에 제출하는 등 이른바 ‘형제의 난’이 일어났고 나머지 형제들이 박용오 회장을 가문에서 쫓아냈다. 5남인 박용만 회장도 4남인 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에 이어 2012년 4월부터 그룹 회장직을 맡아왔다.
이런 두산그룹의 경영권 승계 방식에 대해 경영 능력과 상관없이 경영권 ‘세습’이 이뤄진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경제개혁연구소가 지난해 학계·민간연구소·증권시장 전문가 등 50명에게 의뢰해 재벌 3·4세 11명을 평가한 보고서를 보면, 박정원 회장은 경력 능력 부문에서 100점 만점에 43.4점을 받았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위평량 박사는 “전문가 입장에서 경영 수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평가한 것”이라며 “오너 일가에 의해 경영권 승계가 좌지우지되는 양상이 두산에서도 반복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공업 분야의 장기 침체가 전망되는 상황에서, 두산그룹은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한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한 상황이다. 그러나 4세 경영인이 이러한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을지 우려 섞인 목소리가 많다. 두산은 이에 대해 “박정원 회장이 1999년 ㈜두산 부사장에 취임해 상사비즈니스그룹을 맡은 뒤 이듬해 매출을 30% 이상 끌어올렸으며, 연료전지·면세점 사업 추진 등 그룹의 신성장 동력 발굴에 기여를 해왔다”고 설명했다.
그룹 내부에서는 4세들도 3세 형제들처럼 사촌끼리 돌아가며 경영을 하기 위해 박정원(54) 회장의 경영권 승계 시점이 결정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박정원 회장 외에도 박혜원(53) 두산매거진 부사장, 박지원(51) 두산중공업 부회장, 박진원(48) 전 두산산업차량비즈니스그룹 사장, 박태원(47) 두산건설 사장, 박형원(46) 두산인프라코어 부사장, 박서원(37) 오리콤 부사장 겸 ㈜두산 전무, 박재원(31) 두산인프라코어 부장 등 4세들이 계열사 곳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하지만 그룹 밖에서는 박용만 회장의 나이(62)를 고려할 때, 그가 앞으로 몇년간은 더 그룹을 이끌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박 회장의 사퇴를 두고 두산 실적 악화와 자금난에 대한 책임을 진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까닭이다. 박용만 회장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두산을 소비재 그룹에서 중공업 그룹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2007년 미국의 건설용 소형 중장비 업체인 ‘밥캣’ 인수를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장비 수요가 급감하면서 밥캣 인수는 오히려 두산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해 ㈜두산은 두산중공업·인프라코어·건설·엔진 및 종속회사 연결재무제표 기준으로 1조7008억원의 대규모 당기순손실을 내기도 했다.
이날 두산인프라코어는 국내 사모펀드인 엠비케이(MBK)파트너스에 ‘알짜배기’라 불리는 공작기계 사업 부문을 1조1300억원에 매각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앞서, 올해 안에 두산밥캣의 국내 상장을 추진하기로 하는 등 재무구조 개선 작업의 큰 틀이 잡히면서, 새 출발을 위한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두산그룹이 4세 경영 체제에 접어들더라도 경영 전반에 큰 변화가 일어나진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박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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