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2일 문재인 대통령이 인천공항공사를 찾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며 연 대화 자리에서 한 직원이 눈물을 닦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A는 직장 초년생 때 외근을 주로 했다. 급히 갈 곳이 있으면 운전기사가 딸린 회사 차를 이용했다. 기사는 A보다 10~20살 이상 많았고 정규직 사원이었다. 연차가 오래돼 월급도 A보다 많았다. 나이 많은 그들에게 이것저것 해달라고 하기도 어려워 “내가 도리어 기사를 모시고 다니는 것 아닌가” 하는 기분도 들었다. 그래도 곧 동료로 친해져서 그럭저럭 잘 지냈다. 몇 년 뒤 회사가 수송업무를 외주로 돌렸다. 렌터카 회사에서 나온 기사는 친절했다. 하지만 월급은 반도 못 받는 눈치였다.
연공·종신형 고용이 정규직-비정규직으로 이원화된 것은 1997년 외환위기부터다. 물론, 9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직업파괴’니 하는 경영학 신조어가 수입되고, 국내 대기업과 은행이 50대 초반에 ‘명예퇴직’이란 이름으로 직원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국가부도라 불린 큰 충격파로 노동시장에 이른바 ‘유연화’가 뿌리내렸지만, 매사 그렇듯 여기에도 한 조각의 정의는 있었다. 기업 안에 핵심업무와 비핵심업무가 엄연하고, “홀로 1 만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와 단순 업무를 하는 직원의 처우가 같으면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논문 한 편 없이 10년 이상 똑같은 노트로 강의하는 ‘철밥통’ 교수가 지탄을 받고, 대학이 교수의 논문 편수를 점수화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었다.
20여년이 흐른 2016년 5월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승강장에서 안전문 (스크린도어 ) 수리를 하던 19살 김아무개군이 진입하던 전동열차에 치여 사망했다. 김 군은 그해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메트로의 안전문 수리 협력업체에 입사했다. 일을 시작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사고를 당한 것이다. 작업 매뉴얼에는 2인 1조로 하도록 돼 있었지만 사고 당시 김 군은 혼자였다. 김 군이 남긴 갈색 가방에는 식사를 제시간에 할 수 없었던 듯 컵라면 하나와 나무젓가락이 들어있었다. 김 군 어머니는 “책임감 있고 반듯하라고 가르”친 것이 “미칠 듯이, 미칠 듯이 후회된다”고 절규했다.
한번 고삐가 풀리자 노동시장의 이중화는 거침없이 진행됐다. 정규직 맞은편에서 똑같은 일을 해도, 상시업무에도 계약직, 파견, 용역, 하도급 노동자를 썼다. 고용의 불안정을 더 높은 임금으로 보상하는 보완책은 없었다. 그래서 대기업 정규직 임금이 100일때, 대기업 비정규직 63, 중소기업 정규직 53, 중소기업 비정규직 37(2016년 기준)의 불평등 구조가 고착화했다. 경영 효율화는 명분만 남고 언제부터인지 정규직의 복리가 비정규직의 희생 위에 핀 ‘검은꽃’이 됐다. 무엇보다 정규직이 기피하는 위험한 일을 하청에 맡기는 ‘위험의 외주화’가 폭넓게 퍼져나갔다. 원청보다 열악한 하청업체는 안전보다는 경비절감이 우선이었다. 조선소, 건설현장, 지하철에서 “아니요”라고 말 못하는 계약직과 간접고용 노동자의 희생은 이어졌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이 책 <나는/세상을/리셋하고/싶습니다>에서 “이 시대는 위와 아래가 아니고 안과 바깥이라는 신분제적 위계가 다시 등장했다”며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고 말한다. 시민을 안과 바깥으로 분할통치하는 이 계급사회는 “안으로의 유혹을 통해 끊임없이 사람을 경계에 배치하고 그 경계를 갉아먹는 것으로 움직인다”고 한다.
특히 이 시대의 청년들은 저성장 시대 일자리 부족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에서 오는 모순을 한몸에 받는 처지가 됐다. 기업과 국가는 모자란 일자리 의자를 두고 청년들에게 ‘노오력’ 하면 언젠가 정규직이 될 것이란 ‘희망 고문’을 한다. 하지만 노력해도 변하는 것은 없고 요행히 뭔가 된다 해도 선배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볼 수 없기에 이들은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화가 나 있다. 이들은 아버지 세대처럼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대신 “싸그리 망해 버려서 공평해지자”는 의미에서 ‘리셋’(reset)을 말하기도 한다. 이 사회는 안에서부터 허물어져 가는 소리가 들린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사회 재구성의 첫발
문재인 정부가 공공부문부터 시작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하자, 곳곳에서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교차한다. 우선 공공기관 비정규직 ‘제로’(zero) 정책은 두고두고 국민 호주머니에 부담을 줄 것이라고 한다. 기업도 정부 따라 하기를 하겠지만, 중소기업은 정규직화할 여력조차 없을 것이라 한다. 대기업은 인건비 외에도 의료, 교육비 같은 복리후생비용까지 크게 늘기 때문에 결국 직원을 덜 뽑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말들이 안 그래도 불안한 청년들을 자극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좋지만 내 취업기회가 더 적어지면 어떡하느냐는 걱정을 한다.
세심한 점검이 필요하지만, 가려는 방향이 맞는다면 이번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가시적 변화가 나올 때까지 밀고 가야 한다. 그래서 외환위기 이후 과도하게 불평등 쪽으로 기울어 버린 우리 경제와 노동의 ‘기준선’을 재설정하는 기획이 되어야 한다. 공공기관이든 기업이든 자영업이든 비정규직과 간접고용을 남용해 비용을 줄이고, 약한 처지인 ‘을’을 강하게 통제해 “죽음을 무릅쓰고” 서비스하도록 하는 경영 패턴에 제동을 걸자는 것이다. 19세기 초 영국의 아동노동 금지가 그랬듯, 국가와 정치의 역할은 시민 다중의 요구에 맞춰 사회의 기준을 다시 정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이행과정은 기존 구조에서 오는 비난과 저항을 무릅쓰는 것이기도 했다. 기업은 정규직 전환 이후의 인건비를 감내하면서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중소·중견기업이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해 경영난에 빠지지 않도록 정부는 대·중·소 기업 간 공정거래와 상생의 질서가 유지되는지 감시하고 지원해야 한다.
소비자인 나도 차별을 만드는 구조의 일부 한 아파트단지 입주민 게시판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쓰레기가 제때 치워지지 않는다며 “입주민을 위한 아파트단지냐 경비원을 위한 단지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입주민 A는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 경비원 역시 우리 아파트 구성원 아니겠냐”고 했다. 이에 주민 B는 “‘감성팔이’ 하지 말아라. 경비원은 입주민을 모셔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여러 사람이 “경비원이 종이냐. 무슨 시대착오적 소리냐”고 힐난했다. 그러자 B는 “나도 다른 단지의 경비원이다. 나는 일상적으로 입주민들에게 욕을 먹는데 왜 내 집에서는 그걸 못하냐”고 항변했다. 그 순간 게시판은 조용해졌다.
엄기호는 이 책에서 “한국사회는 선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신뢰의 연결망으로서 사회가 아니다. 늘 누군가에 모욕을 당하고 살면서 반드시 누군가에게 돌려줄 기회만을 바라는 원한의 피라미드”라고 말한다. 이 모욕의 피라미드를 작동케 하는 것은 정규직, 비정규직 같은 노동의 위계화이다. 도처에서 갑질을 당해도 “아니오”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런 모욕의 또 다른 동력은 소비자본주의이다. 노동자로서 받은 모욕을 대신 돌려줄 유일한 출구가 시장에서의 소비자다. 소비자 주권이 노동의 위계 구조와 잘못 연결되면 약자인 비정규직과 간접고용 노동자가 모욕의 집중적인 ‘총알받이’가 된다. 고객의 욕설을 묵묵히 참으며 속으로 병을 키우는 계약직 콜센터 직원들이 대표적이다. 왕이 된 소비자는 싸고 친절하고 빠른 서비스를 원한다. 이럴 때 기업은 불친절하거나 서비스가 늦으면 언제든 계약을 해지할 수 있고 임금 비용도 절감되는 비정규직을 사용하려는 유혹에 노출된다.
그래서 정부와 기업만의 책임으로 돌릴 일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 자신도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집에서는 소비자이지만 회사에서는 노동자로 살아간다. 친절과 신속함만을 소비하려고 하는 마음이 나를 비정규직으로 밀어내고 쥐어짜는 우악스러운 팔뚝 힘으로 돌아올 수 있다. 다소 느려도, 돈이 좀 더 들어도, 종처럼 굴지 않아도 받아줄 수 있을 때 ‘이중국민’(정규직-비정규직)의 사회를 재생산하는 주술에서 풀려날 수 있다.
동등한 시민이 협력으로 공통세계 지어내야 서울 송파구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주민들은 4월에 대표회의를 열어 무인경비시스템 도입을 백지화했다. 이에 따라 122개동 5540가구를 관리하던 경비원 283명은 일괄해고될 위기를 넘기고 일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2015년 아파트 경비원에게도 최저임금제가 적용되면서 불기 시작한 무인경비시스템 도입과 경비원 해고는 이 아파트에도 불어닥쳤다. 하지만 “택배를 받아주고 아이들 안전을 돌봐주는 등 기계가 경비원을 대신할 수 없는 이유가 수없이 많다”며 경비원 해고를 반대하는 대자보가 잇따라 붙기 시작했다. 커뮤니티 앱인 ‘밴드’ 등에서 토론이 계속됐고, 휴일에 주민 1200여명이 모이는 집회도 열었다. 무인경비시스템 백지화는 이런 소통의 결실이었다. 경비절감 바람은 여전히 거세지만, 경비노동자 감원 대신 이들과 동행하려는 따뜻한 아파트들도 많아지고 있다.
이른바 ‘헬조선’에서 우리는 외롭고 지쳐있다. 엄기호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생애사를 기획하는 것도, 사회 안으로 진입하는 것도 불가능”해진 상황에 화가 나 있다고 말한다. 해결의 열쇠를 쥔 리더십에 대한 불신도 커져 있다. 기득권자가 주도하는 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말로 이뤄지는 정치와 지식에 대한 반감이 고조됐다. 인터넷상의 혐오와 공격이 보여주듯 “반 정치의 정치, 반지식의 지식이 급격히 대중화”하고 있다고 엄기호는 진단한다.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통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 등에서 보듯 이는 우리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해법은 공동체로서의 사회를 복원하는 길뿐이다. 그리고 이는 “공동의 노력으로 공통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송파구의 아파트 주민들이 경비원 해고 문제를 논의하면서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해 공감을 한 것처럼 말이다. 87년 체제는 정치 절차의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협력의 기초인 동등한 시민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올겨울 촛불집회는 87년 체제에 멈춘 민주주의를 한 단계 고양할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비정규직이든 파견노동자이든 그들을 “동료 시민으로서 존엄하고 평등한 존재” 로 보고 “협력으로 말 거는 공동체를 만드는” 시도를 할 때다. 이것이 이 책의 바람대로 “리셋을 넘어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기초”일 것이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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