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서울 강남구의 한 공유사무실에서 소셜벤처 커넥트엑스 김근묵 사장(58·사진 가운데) 등이 기업 내 성추행 등 성범죄 대응을 위해 구성원들이 피해기록을 작성하고 공동신고를 하도록 돕는 애플리케이션 ‘리슨투미’의 개발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직장이나 학교 등 조직 안에서 나홀로 고민하는 성범죄 피해자들의 #미투(MeToo)를 네트워킹할 수는 없을까?
소셜벤처 커넥트엑스가 개발한 ‘리슨투미(LISTEN2ME)’ 애플리케이션은 이 질문에 “할 수 있다”고 답한다. 소셜벤처는 사회문제의 해법을 만드는 데서 비즈니스 기회를 찾는 새로운 창업 흐름이다. 이 회사를 창업한 김근묵 사장(58)은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진행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직장·학교 내 성범죄가 일어났을 때 피해자는 2차 피해가 두려워해서 침묵하고, 참다 못해 신고를 한다 해도 시기가 수개월에서 수년 뒤로 지연되다 보니 사실관계 다툼이 생기는 일이 흔하다. 피해직후 기록작성을 돕고, 성추행·성희롱 가해자들이 상습범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공동신고를 독려할 방법을 모색했다”고 말했다.
리슨투미는 기업체나 대학 등이 이 시스템을 도입하면 직원이나 학생·교직원 등이 이 앱을 내려받았다가 성범죄가 발생했을 때 쓸 수 있도록 한다. 먼저 혼란과 고통에 빠진 피해자가 사건 발생 직후 6하원칙에 따라 기록을 작성해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돕는다. 앱의 객관식·주관식 문항에 답변하는 식으로 기록을 작성하지만 이는 암호화 돼 피해자 휴대전화에 보관될 뿐 회사 서버에 보관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마음의 결단을 내리고 신고 기능을 눌러야만 조직 내 담당자에게 이 내용이 전달된다. 한걸음 더 나아간 점은 ‘같은 가해자 알림’과 ‘공동 신고’ 기능을 넣은 것이다. 누군가 정식 신고는 하지 않았더라도 앱을 통해 가해자를 지목해 피해기록을 작성했다면, 또다른 피해자가 같은 가해자를 대상으로 기록을 작성하는 순간 “동일한 상대방을 (가해자로) 지목한 이용자가 이미 있습니다. 용기있는 신고로 추가 피해를 막으시겠습니까?”라는 알림이 뜬다. 또 복수의 피해자가 함께 신고를 선택했을 때 진짜 신고로 이어지는 ‘공동신고’ 기능을 배치했다. 김 사장은 “낮은 신고율 때문에 피해자들은 숨어서 자책하고 가해자들은 또다른 성추행이나 성희롱을 지속하는 일을 줄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앱은 기록 과정에서도 피해자의 혼란스러운 심경을 최대한 고려했다. ‘기록하기’ 버튼을 누르면, 사건 발생 날짜와 시간대, 장소, 왜 그곳에 가게 됐는지 등 전문가가 치밀하게 설계한 문항에 차근차근 답변해 나가면 추후 사건처리에 필요한 주요 정황들을 대부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또 기록 중에도 “본인 잘못도 아닌데 많이 힘드셨죠? (중략) 생각이 잘 안 나신다면 다음에 수정하셔도 되니까 침착하게 저를 따라와 주세요” “건물명, 상점명, 거리 이름 등 주소와 관련된 정보를 떠올려주세요” “기억이 안 날 경우 교통카드 이용내역, 신용카드 결제내역을 조회해보세요” 등 당황한 피해자가 중도 포기하지 않도록 지원한다.
이후 앱은 신고를 선택하기 전까지는 이 기록을 철저히 개인 소유로 관리한다. 다만 이런 기록이 작성될 경우 회사는 내용은 몰라도 추후 신고로 이어질 잠재적 사건들이 쌓이고 있다는 점을 파악해 조직 문제를 사전에 감지할 수 있다. 김 부사장은 “기업 내 성범죄를 은폐하는 등 초기 대응을 잘못 했던 특정 기업은 사회적 공분을 사면서 해당 분기에만 두자릿 수 매출액 감소를 겪고 영업에 큰 타격을 받았다”며 “기업이 리스크 관리 중요성을 깨닫고 시스템을 구매하면 ‘1+1’로 대학 등에 같은 시스템을 기부하는 방식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커넥트엑스는 삼성·에스케이(SK) 등 대기업을 나와 핀테크 보안인증 기술로 창업 생태계에 뛰어들었던 김 사장과 창업동지 등 40~50대 6명이 다시 뭉쳐 지난해 초 새로 창업한 소셜벤처다. 지난해 1월에 앱 개발에 들어가 10월께 시스템을 완성한 뒤 글로벌 미투 바람을 목격하게 됐다. 이에 학내 성추행 사건으로 한때 홍역을 치렀던 한 대학이 이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한 상태여서, 올해 상반기 중 시장의 첫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김 사장은 “핀테크 보안인증 사업 중 금융계 여성 직장인들로부터 가슴에 묻은 직장 내 성추행 사건 등을 들으며 아이디어를 가다듬었고, 성폭력상담소 등 전문가 자문을 통해 피해자에게 어떤 지원이 가장 절실한지 살폈다”면서 “기술을 통해 ‘미투’와 ‘미투’를 이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세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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