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16일 문재인 대통령이 세종컨벤션센터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 들어 사회안전망 강화와 복지 체계 정비, 공공 주도 일자리 창출 등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강조되면서 확장적 재정정책에 관심이 고조돼왔다. 재정정책 확장성 논의는 국가채무 증가를 어느 선까지 감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로 이어진다. 그러나 한 해 20조원 넘는 초과세수를 거두는 역대급 ‘세수 호황’에 가려져 국가채무 논쟁은 그동안 미뤄져왔다. ‘반도체 거품’이 꺼지며 세수 호황이 저물어가는 지금, ‘국가채무비율 40%’ 논란이 제기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논란의 출발점
발단은 2019년 5월1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였다. 비공개로 열린 회의에서 재정 당국 수장인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가채무비율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40% 선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언급하자, 문 대통령이 “40% 비율의 근거가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확장적 재정정책을 주도하는 청와대와 보수적인 곳간지기 역할을 하는 기획재정부 사이에 인식차가 나타났다는 평가가 제기됐다. 보수 언론들은 문 대통령이 과감한 재정정책을 요구했다며, 급격한 고령화 추세에 나랏빚은 눈덩이처럼 불고 국가채무비율도 수직 상승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난데없는 ‘40% 논란’에 재정 당국은 진화에 나섰다. 홍 부총리는 5월23일 정부세종청사 기자실을 찾아 “최근 몇 년 동안 이어진 초과세수가 없어지는 이상 내년도 국가채무비율이 40%를 넘어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며 “사회안전망 강화의 필요성과 어려운 경제 여건 등을 고려할 때 확장적 재정정책은 당연한 선택이며, 이 경우 국가채무비율은 40%를 넘기게 된다고 당시 회의에서 보고했다”고 말했다. 애초 국가채무비율 40%를 재정건전성의 ‘마지노선’으로 언급한 사실이 없다는 뜻이다.
회의에 참석한 기재부 관계자는 “회의에서 부총리가 국가채무비율 40%를 반드시 지키겠다고 선을 그은 사실이 없다”며 “문 대통령 발언도 40% 기준에 경제학적 근거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보충 질문의 취지”라고 말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오보에서 비롯한 것”이라며 논란을 일축했다.
국가채무 한계치?
논쟁 자체는 해프닝으로 끝나는 분위기지만, 국가채무비율 40%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유럽연합(EU) 토대가 된 마스트리흐트조약에서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 가입 조건으로 제시한 국가채무비율 60%가 그 시초다. 급격한 고령화 추세로 재정 부담, 가까운 미래에 현실화할지 모르는 통일 비용 등을 고려해 40% 안팎으로 국가채무비율을 관리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재정 당국 관계자들 사이에 형성됐다. 재정을 운용하는 이들이 심리적으로 공유하는 저항선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이렇게 형성된 기준 자체가 지금은 사실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일본, 유럽연합 등이 확장적 재정정책을 펼치면서 재정건전성에 대한 글로벌 기준이 완화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국가채무비율은 금융위기 이전인 2007년 국내총생산 대비 73.5%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113%에 이른다.
앞서 국제통화기금(IMF)은 글로벌 저성장 기조가 분명해지자, 2015년 ‘국가채무는 언제 줄여야 하는가’라는 보고서를 내고 “낮은 채무 수준은 예기치 못한 위기에 대비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들지만, (그 대가로) 투자와 성장이 희생된다면 이런 여력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국채이자율이 경상(명목)성장률에 미치지 못하는 저금리 시대에는 적극적 국채 발행에 의한 경기 대응이 요긴하다는 최근 재정학계 추세와 같은 내용이다.
그렇다면 경제학적으로 바람직한 국가채무비율을 설정할 수 있을까? 가장 보수적인 재정 당국의 암묵적 견해는 40%대 중·후반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석진 명지대 교수(경제학)는 “한국 경제가 감내할 수 있는 국가채무비율 최대치는 60%대 후반에서 70% 수준일 것”이라며 “고령화 추세 등 자연적 증가분을 고려할 때 현 상황에서 최선은 50%대 초반 정도”라고 추정했다. 앞서 2010년 국제통화기금은 90%, 국제결제은행(BIS)은 85%를 제시한 바 있다. 심지어 2018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국가채무비율이 국내총생산 대비 265%까지 늘어도 세율 인상 등으로 상환할 수 있다며, 한국의 재정 여력이 225%포인트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2019년 5월23일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에서 추가경정예산의 국회 처리 필요성 등 경제 현안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재정여력 판단 기준
기재부 고위 관계자는 “재정 당국은 경기 상황과 재정건전성, 인구구조를 비롯한 사회구조 변화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해 재정 적자폭을 결정한다”며 “국가채무비율 증가세가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통제되는 상황이라면 숫자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40%’로 대표되는 국가채무비율의 마지노선을 설정하고 지키느냐가 아니라 나랏빚 증가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국가채무비율을 무한정 늘려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재정건전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각에도 합리적 이유는 있다. 먼저 한국은 대외의존도가 높은 소규모 개방경제다. 대외신인도의 주요한 판단 기준인 국가채무비율을 마냥 무시하기 어려운 경제구조인 셈이다. 달러·유로·엔 등 국제 금융거래에 활용되는 통화를 발행하는 기축통화국도 아니다. 더구나 한국 경제는 급격한 대외신인도 저하와 외국자본 유출로 외환위기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재정 여력은 풍부한 편이다. 미-중 무역분쟁 등 대외 여건이 악화해 L자형 장기 경기침체가 우려될 정도로 상황이 좋지는 않다. 이럴 때일수록 확장적 재정정책으로 경기를 반등시킬 모멘텀을 찾아야 할 필요성이 크다. 해마다 달라지는 국내총생산이 아니라 정부 자산과 국가채무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정 여력을 판단하는 좋은 방법이다. 2019년 6월11일 발간된 <재정동향 6월호>에 따르면, 한국의 국가채무(D1 기준)는 660조2천억원이다. 반면 국유재산은 1085조3천억원에 이른다. 국가채무 성격을 보면, 대부분 국내에서 소화되는 국민주택채권이 74조4천억원, 환율 안정을 위해 발행하는 외환평형기금채권이 6조6천억원이다. 이를 제외한 국고채권으로만 따져보면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은 20%대에 머문다.
국제 비교에서도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은 매우 낮은 편이다. 2018년 결산 기준 한국은 38.2%로,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라트비아(0%), 에스토니아(9%), 룩셈부르크(23%) 등을 제외하고 가장 낮은 수준이다. 선진국은 미국 136%, 영국 92%, 프랑스 112%, 캐나다 110%로, 그 비율이 한국의 2~3배에 이른다. 이웃 일본의 국가채무비율은 무려 233%다.
더 떨어진 채무비율
최근에는 한국은행의 국민계정 개편으로 2018년 국내총생산이 111조원 늘어난 것으로 집계돼, 국가채무비율 40% 논란 자체가 머쓱해지는 일도 벌어졌다. 한국은행은 5년마다 전체 국민의 경제활동 총량을 의미하는 국민계정을 개편한다. 2010년에서 2015년으로 기준연도를 바꾸면서 2018년 국내총생산이 1782조원에서 1893조원으로 늘어난 것이다. 5년 전까지 포착되지 않았던 신산업의 부가가치 생산이 추가됐고, 공공기관의 소프트웨어 개발비를 지출에서 투자로 바꾸는 등 달라진 국제 기준에 따른 변화였다.
이 기준에 따라 재산정하니, 2018년 국가채무비율이 38.2%에서 35.9%로 떨어졌다. 기재부는 수정된 수치를 8월 말께 국회에 제출하는 2019~2023년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반영할 예정이다. 정부는 4월 ‘미세먼지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2019년 말 기준 국가채무비율을 39.5%로 전망했다. 또 2020년 40.3%, 2021년 41.1%, 2022년 41.8%로 내다봤는데 국내총생산이 늘어나 이 비율도 낮아지게 됐다.
전문가들은 ‘40%’라는 숫자에 갇힐 것이 아니라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기 부진에 대응하기 위한 단기 재정지출은 국가채무로 충당할 수 있겠지만, 복지 재원 등 지출이 지속될 사업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고민을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성현 인천대 교수(경제학)는 한국 경제가 부진의 늪에 빠진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주거·교육·양육 등의 문제를 개인에게 떠민 결과 저출산·고령화라는 인구구조 변화가 심화한 것을 들면서 “재정 역할은 이런 삶의 조건을 정상화해 성장잠재력을 되살리는 것이고,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재정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정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 고민과 함께, 보편적 증세를 논의하는 물꼬를 터야 한다는 뜻이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