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2020년 예산안 브리핑에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발언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올해 예산안 발표를 앞두고 기획재정부를 출입하는 기자들은 총지출 증가율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확장적 재정을 선언한 문재인 정부가 재정의 부담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그 의지를 가늠할 수 있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9%에 조금 못 미치는 8%대 후반의 증가율을 점쳤습니다.
해마다 예산안 편성 과정에 재정을 풀고 싶어하는 정치권과 나라 살림을 걱정하는 곳간 지기의 힘겨루기가 벌어지지만, 올해는 그 모양새가 각별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지난해 이미 9.5%에 이르는 총지출 증가율을 기록해 부담이 커진 데다, 반도체 경기 부진 등에 따라 내년 세입여건이 악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국민연금 등 적립식 사회보장기여금이 포함돼 해마다 수십조원의 흑자를 기록하던 통합재정수지도 고령화 추세에 따른 지출 증가로 올해부터 적자로 반전될 예정입니다. 여러모로 재정 건전성을 중시할 환경이 조성된 셈입니다.
앞서 기획재정부와 청와대는 한차례 샅바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정부 안에서 곳간 지기 역할을 맡은 기재부는 재정을 가계와 기업을 뒷받침하는 경제의 마지막 안전판으로 여깁니다. 당연히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재정 운용을 선호합니다. 반면 청와대는 확장적 재정을 경제 운용의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습니다. 재정 운용에 대한 철학과 관점의 차이가 충돌한 무대는 지난 5월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당·정·청의 고위 인사들이 모두 모여 국정 성과 및 재정 운용을 평가하고 토론하는 자리였습니다.
당시 경제 활력 제고와 포용성 강화를 위한 재정 총량에 대해 보고하던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고령화 추세 등에 따른 복지 지출의 증가세 등 재정 부담 요인 등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이어 재정 건전성을 지키기 위해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국내총생산 대비 3% 미만으로 유지하고, 국가채무비율을 40%대 초반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적정 국가채무비율 40%에 과학적 근거라도 있는 것이냐”고 캐물었습니다. 적극적 재정 투입을 통한 혁신적 포용국가 건설 방안을 논의하던 회의장이 일순 얼어붙었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진 뒤 홍 부총리가 “재정을 책임지는 저로서는 국가채무가 늘어나는 것과 재정수지 적자가 커지는 것에 대한 정보를 같이 제공해 이에 대한 균형감 있는 논의가 있길 바라서 보고 드린 것”이라고 해명하는 것으로 논란은 일단락됐습니다. 그러나 경제 운용의 두 주체가 조만간 본격적인 힘겨루기를 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해 보였습니다. 어차피 본게임은 7~8월에 편성하는 내년도 정부 예산안을 놓고 벌어집니다. 기재부 예산실은 마치 그들의 디엔에이(DNA)에 새겨진 본능처럼 재정 건전성에 집착합니다. 고령화 추세에 따른 장기적인 재정 부담, 세입여건의 악화, 소규모 개방 경제라는 한국 경제의 특성 등 재정 건전성의 필요성에 힘을 보태는 논리들이 총동원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지난달 말 발표한 2020년 예산안은 사실 기자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2020년 예산안의 정부 총지출 규모는 513조5천억원으로 지난해에 비해 9.3% 증가했습니다. 2019년 9.5%에 이어 2년 연속 9%대 증가율을 기록한 것입니다. 부가가치세 가운데 지방으로 이전되는 지방소비세 비율을 11%에서 15%로 4%포인트 올려 부가가치세수 5조원 남짓이 곧장 지방 재정으로 흘러가는 점, 내년에는 올해보다 국세수입이 줄어들 것으로 예견되는 가운데 확장재정을 선택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 확장적 재정 운용”이라는 홍 부총리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철학이 담긴 예산안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숫자는 관리재정수지와 국가채무비율입니다. 정부는 내년도 관리재정수지가 국내총생산 대비 3.6%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국가채무비율은 올해 37.1%에서 39.8%로 뛰어올라 40%의 턱밑에 이를 전망입니다. 올해를 포함한 5년 치 재정 전망을 밝히는 ‘2019~2023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보면, 관리재정수지는 2023년 3.9%로 적자 폭이 오히려 커지고, 국가채무비율도 2023년 46.4%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됐습니다.
국가채무비율은 누적된 나라의 빚이 국내총생산 대비 어느 수준에 도달하는지 장기적인 전망치를 보여준다면, 관리재정수지는 한 해 나라 살림이 얼마나 건전한지 단기적인 재무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재정당국은 이 두 가지 지표를 통해 장단기 나라 살림의 건전성을 평가하는데, 관리재정수지 3% 적자와 국가채무비율 40%는 이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암묵적인 마지노선입니다. 정부는 앞서 2016년 당시 국무회의를 통과한 재정 건전화 법안에서 아예 국내총생산 대비 관리재정수지 3% 적자와 국가채무비율 45%를 재정 운용의 한계로 못 박으려 한 적도 있습니다. 이번 예산안과 국가재정운용계획은 이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것입니다.
경기 부진을 넘어서기 위해 좀 더 예산을 풀어야 한다는 요구도 있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내년도 예산안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확정적 재정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전문가들은 특히 예산실의 ‘금과옥조’ 관리재정수지 3% 적자의 벽이 깨진 점에 놀라워했습니다. 지금까지 관리재정수지 3% 적자 이상의 확장 예산이 편성된 사례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구윤철 기재부 2차관은 “재정이 제 역할을 한다면 한국 경제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는 비장한 각오로 예산안을 편성했다고 말씀드린다. 과거 같으면 산업 예산, 연구개발(R&D) 예산 이렇게 늘리기 어렵다. 이번에는 정말 돈 없어서 못 한다는 이야기 나오지 않도록, 정부가 최선을 다해서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철학으로 임했다. (세입여건 등) 어려운 가운데서도 늘릴 것은 제대로 늘려보고, 물이 철철 넘쳐서 산업의 싹이 돋아나도록 하겠다는 각오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자못 비장미 넘치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별 탈 없이 확장적 예산이 편성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한국은행 2015년 기준연도 개편이라는 변수입니다. 한은은 5년 단위로 경제 상황에 맞춰 국민 경제활동의 총량을 보여주는 국민계정 통계를 업데이트합니다. 한은이 이 예정된 일정에 따라 6월 초 2015년을 기준으로 국민계정을 변경하자, 지난해 국내총생산이 1782조원에서 1893조원으로 111조원(6.2%) 늘었습니다. 이에 따라 지난해 국가채무비율도 38.2%에서 35.9%로 2.3%포인트 떨어졌습니다. 분자(국가채무)가 그대로인데, 분모(GDP)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재정 운용의 여력이 그만큼 커진 것입니다. 불과 한 달 전 대통령을 앞에 두고 벌인 국가채무비율 40% 논쟁이 무색해졌습니다.
문제는 한은의 기준연도 변경이 5년마다 진행되는 정례적인 일이라는 점입니다. 한은은 국민계정의 기초가 되는 인구주택총조사, 경제총조사, 실측 투입산출표 등을 5년마다 업데이트하는데, 5년 전인 2014년 국민계정의 기준연도를 2005년에서 2010년으로 변경했을 때도 같은 현상이 있었습니다. 당시 기재부의 예산안을 보면, 정부는 2014년 국가채무 514조8천억원, 국가채무비율은 36.4%로 전망했지만, 결산 자료를 보면, 국가채무는 533조2천억원으로 늘었고 국가채무비율은 오히려 35.9%로 떨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국내총생산이 늘어난 점이 반영된 것입니다.
청와대는 기재부의 의도를 의심했습니다. 대통령이 참석한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국가채무비율 40%가 코 앞이라며 재정 건전성을 강조한 게 불과 한 달 전 일인데, 기재부가 의도적으로 기준연도 개편과 이에 따른 재정 여력의 보강을 누락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었습니다. 정부 한 관계자는 “당시 기재부가 기준연도 개편의 효과를 사전에 인지하고도 재정적자의 위험성을 과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보고를 누락한 것 아닌지 청와대의 의구심이 컸다. 결국 민정수석실에서 의도적인 보고 누락인지 여부를 확인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청와대 입장에선 기재부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고 판단한 셈입니다.
민정수석실 조사 결과, 기준연도 개편 효과를 누락한 것은 ‘의도치 않은 실수’로 봉합된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이미 기재부 입장에서는 청와대와 힘겨루기를 이어갈 명분과 터전이 사라진 셈입니다. 9.3%에 이르는 총지출 증가율, 국내총생산 3.6%에 달하는 관리재정수지 적자, 2023년 46.4%까지 오르는 국가채무비율은 그렇게 결정된 숫자들인지 모릅니다. 이 때문일까요?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 한 관계자는 “올해 예산 작업은 평소보다 참 수월했다. 예년에 비하면 당 요구를 잘 따라줬다”고 말했습니다. 평소와 같은 힘겨루기 없이, 밀어보니 쭉 밀리더라는 소회입니다.
그나마 일본의 수출규제가 기재부 입장에선 알리바이가 됐을 듯 합니다. 기재부는 예산안에 핵심 소재·부품·장비 산업 자립화 등을 위한 산업·연구개발 분야 예산을 대폭 증액했습니다. 2020년 예산안에 기재부가 스스로 붙인 부제는 ‘국민중심·경제강국’ 예산안이었습니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