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28일 스웨덴 엘름훌트의 이케아 박물관에서 한 방문객이 잉바르 캄프라드의 대형 초상화를 휴대전화로 찍고 있다. 이케아 창업자인 캄프라드는 하루 전인 27일 스몰란드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 연합뉴스
스웨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업이 바로 이케아(IKEA)일 것이다. 이케아는 가구를 비롯해 여러 생활소품을 파는 회사다. 2020년 기준 40여 개국에 진출했다. 2014년 겨울, 한국에도 입점했다. 이케아에 가려는 사람들로 매장이 들어선 경기도 광명에 주말마다 교통 대란이 났을 정도로 화제가 됐다. ‘스웨덴스러움’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는 이케아는 로고 디자인마저 스웨덴 국기를 연상케 하는 노랑과 파랑으로 제작했다.
이케아의 창업자 잉바르 캄프라드는 1943년 스웨덴 남쪽 지방에서 잡화상으로 시작해, 평생을 바쳐 이케아를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웠다. 기업가로서 탁월함을 제외하고도 여러모로 특이한 사람이다.
잉바르 캄프라드, 이름은 낯설어도 이케아란 브랜드를 들어봤다면 잉바르 캄프라드라는 이름을 들어본 것이나 다름없다. 이케아의 앞 두 글자 IK가 바로 그의 이름 잉바르 캄프라드에서 나왔다. 그럼 뒤의 두 글자 EA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농장 엘름타리드(Elmtaryd, 현재는 Almtaryd로 표기)와 농장이 있던 마을인 아군나리드(Agunnaryd)의 첫 글자를 땄다. 잉바르(I) 캄프라드(K) + 엘름타리드(E) + 아군나리드(A).
2018년 세상을 떠난 이케아의 창업자 잉바르 캄프라드는 2015년 블룸버그가 집계한 억만장자 명단 8위에 올랐다. 당시 자산 추정치가 587억달러, 변환하니 약 67조5천억원이다. 대한민국 1년 예산이 500조원 정도니, 대략 ‘캄프라드 7명=대한민국 1년 예산’이란 공식이 성립한다. 참고로 2020년 기준, 고 이건희 회장의 주식자산이 약 18조원이었다.
탁자만도 1초에 수백 개씩 팔리는 이케아 왕국의 성공 비결이 무엇일까. 개인용 제트기도 살 만한 양반이 저가항공 이코노미석을 고집하고, 구식 자동차 볼보를 15년째 몰았을 정도로 지독한 구두쇠라고 알려진 캄프라드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된 이유는 탁월한 사업 수완에 있다.
1926년 태어난 캄프라드는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10대 소년 시절 스톡홀름에서 성냥을 헐값에 사다가 낱개로 팔아 돈을 모았고 그다음엔 종목을 넓혀가며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 가져다 팔았다. 공부도 잘했는지 어느 날 캄프라드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오자 그의 아버지가 용돈을 두둑하게 주었는데 그 돈을 밑천 삼아 1943년 17살에 창업한 회사가 바로 이케아다.
처음에는 작은 소품부터 장신구까지 닥치는 대로 팔다가 창업 5년째 되던 1947년부터 가구를 팔았는데 인기를 끌자 다른 제품군을 접고 가구에만 집중했다. 1953년엔 이케아의 트레이드마크인 쇼룸을 열었다. 이케아 매장에 가보면 통째로 사버리고 싶은 방이 한층 가득 줄지어 있다. 제품을 종류별로 모아 전시하는 대신, 방 하나를 여러 이케아 제품으로 채웠다.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많이들 독립한다. 빠듯한 학생 형편상 ‘무토’니 ‘알바르 알토’니 하는 절제된 세련미가 뚝뚝 떨어지는 고급 가구는 눈으로만 보고, 현실에선 대부분 이케아 또는 중고가게를 이용한다.
주머니 사정이 취향을 지배하는 건 참 슬픈 일이다. 하지만 빠듯한 예산치고 스웨덴서 살던 시절 내 학생 아파트는 꽤 예뻤다. 옆집 친구가 이사 갈 때 두고 간 두툼한 흰색 카펫으로 바닥을 깔고 중고 소파에는 고급스러운 천을 씌웠다. 계절마다 다른 색 커튼을 걸었고, 빨강과 오렌지색 쿠션을 곳곳에 놓았다. 취향과 예산의 절충안이었지만 서글픈 수준은 아니었다. 넉넉지 않은 학생 살림에 계절마다 분위기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이케아 덕이다.
“100만원짜리 좋은 책상은 어떤 디자이너라도 만들 수 있지만, 2만원짜리 좋은 책상은 뛰어난 디자이너만이 만들 수 있다.” 누구나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디자인을 누리게 하는 것, 이케아에선 이를 ‘디자인의 민주화’라고 표현한다. 이케아가 최고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데 공들이는 이유기도 하다.
아이들의 꿈이 ‘부자’인 시대이니 캄프라드 정도의 재력이면 어디서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될 테지만, 스웨덴에서 캄프라드는 그리 존경받는 인물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나치 모임에 참가한 전력, 세금을 회피할 목적으로 스위스로 이민 갔던 일 등 발목을 잡는 과거 때문이다.
2018년 1월 캄프라드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업적으로 특집 보도를 하며 북적대는 외신과 달리 스웨덴은 의외로 조용했다. 이케아 매장 구석에 작은 방명록만 두고 간소하게 지나갔다. 북유럽에서 ‘괘씸죄’에 해당하는 탈세 때문에 인정은 받지만 존경은 못 받는 기업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캄프라드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모두 놀랐다.
“전 재산의 절반은 사남매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은 노를란드 발전 기금으로 쓸 것.”
노를란드는 스웨덴 북부 지역으로 전통적으로 탄광과 목재산업 중심지다. 스웨덴 인구 10~15%가 산다. 젊은층은 다 도시로 떠나고 노령인구가 대부분이다. 스웨덴 정부 주도형 이민자 정착지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짠돌이’로 유명한 캄프라드가 과거 이케아 내부 경영진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했던 일이 있다.
2006년 스웨덴 북단 하파란다에 이케아 매장을 세운 것이다. 당시 캄프라드와 친분 있던 스웨덴 환경부 장관이 인적 드문 하파란다에 이케아 매장을 내도록 설득했다. 시골 출신인 캄프라드는 젊은층의 지역 이탈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지역경제를 살려 사업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하파란다에 문을 연 이케아는 뜻밖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스웨덴 최북단에 있는 하파란다 이케아는, 러시아로 향하는 이케아의 전초기지이자 물류창고 구실을 했다. 황량하던 하파란다 지역이 스웨덴 도시 가운데 무역수지 3위를 기록할 정도로 경제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케아 덕분에 근처에 거주하던 이민자를 비롯해 고용인구가 크게 늘었고 도시가 북적댔다. 캄프라드 유언을 이해하기 쉽게 보자면 경상도나 전라도의 어떤 거부가 재산의 반을 함경도와 황해도 발전 기금으로 내놓았다고 보면 된다.
하파란다의 변화를 보며 돈은 이렇게 쓰는 거다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 탈세와 절세의 경계에 서서 경영한 것에 대한 약간의 반성일까? 유산의 절반이라고 해봐야 이미 대부분은 재단에 묶여 수백억원 수준이겠지만, 구두쇠 영감의 유언에 어느 정도 진심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하수정 <북유럽 비즈니스 산책> 저자
stokhol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