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누스 총재가 ‘신나는 조합’ 사무실 앞에 도착해 강명순 조합 이사의 환영을 받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노벨평화상 수상자 유누스 ‘한국의 그라민은행’ 찾다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에요. 돈의 물줄기, 돈의 문화를 바꿔야 합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금융의 물결, 이를테면 ‘소셜 월스트리트’(Social Wallstreet)의 씨앗이 쑥쑥 자라나길 꿈꿔 봅니다.” 손에 쥔 포크로 잡채를 둘둘 감아올리면서도, 유누스 그라민은행 총재의 얘기는 끊기지 않았다. 비빔밥 맛이 익숙하지 않은 듯 고개를 연신 갸우뚱하면서도 예순을 넘긴 나이(66)를 가늠하기 힘든 그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유누스 총재가 한국의 대표적 마이크로 크레디트(무담보 소액대출) 기관인 ‘신나는 조합’을 찾은 19일 낮, 서울 서대문 인근 허름한 건물의 20평 남짓한 사무실은 신나는 조합을 통해 자금 지원을 받은 빈곤층 대출자들과 그들을 돕는 조합 일꾼들, 그리고 취재진으로 빼곡이 들어찼다. 신나는 조합과 그라민은행의 인연을 맺어준 씨티은행의 하영구 행장도 자리를 함께 했다. 참석자들은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하며 연신 얘기꽃을 피워갔다. 도시락은 신나는 조합으로부터 대출받은 자금을 밑천 삼아 서울에서 도시락 사업을 하는 한 여성 자활 소모임이 정성껏 준비했다.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세계무역기구(WTO)다 하며 우리 농업은 갈수록 죽어갑니다. 이 문제에 대해 그라민은행 모델은 어떤 답을 줄 수 있죠?” 강화도에서 손맛 김치를 만들어 판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 여성 대출자는 하소연하듯 질문했다. “한국의 농민, 방글라데시의 농민, 아시아의 소비자, 유럽의 소비자들 사이의 연대가 점점 중요해지지 않을까요?” 유누스 총재는 답변 끝자락에 ‘공정 무역’을 해법의 하나로 풀아놨다.
“돈만 꿔주면 뭐하나요, 돈을 빌렸다가 망하면 빈곤층은 더 큰 빚을 지게 됩니다. 중요한 건 애프터 서비스더군요.” 한 활동가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이 창업 자금 지원에만 그친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유누스 총재는 “그라민은행도 이제는 교육과 마케팅 등으로 관심을 넓혀 소규모 정보센터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소개하면서도 “그러나 중요한 건 가난과 싸워 이길 힘은 빈곤층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방글라데시는 가난해도 ‘행복 지수’는 높다면서요? 그라민은행이 성공한 데는 그런 배경도 있는 건 아닐까요?” 경상남도에서 올라온 한 대출자의 얘기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유누스 총재는 “방글라데시는 전체 인구의 85%가 농촌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라민은행이 뿌리내리기 훨씬 쉬웠을 것”이라며 “하지만 일상생활에 필요한 수단이 어느 정도 마련되면, 그 이상은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생활 자세를 한국 사람들도 조금은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웃으며 되물었다.
유누스 총재는 “왜 이웃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를 고민했던 젊은 경제학 교수 시절로 잠시 되돌아가기도 했다. 그는 30년 전 마을 곳곳을 샅샅이 돌아다니다가 결국 “단돈 27달러라는 종잣돈이 없어 수많은 사람들이 고리대의 악순환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의 소회를 털어놓았다. 그는 “잘 사는 나라든 못 사는 나라든 가난 때문에 종잣돈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선 점혀 차이가 없다”며 “어느 누구나 금융 서비스에 다가설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는 게 바로 가난을 내모는 첫걸음”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오늘 오전 노무현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한국 정부가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어요. 한국 사회에서도 가난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횃불을 높이 들어주세요.” 유누스 총재는 끝으로 당부했다. 참석자들은 “빈곤을 몰아내기 위해선 철저하게 현장에 다가서야 한다”는 유누스 총재의 행동 철학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고 입을 모았다.
최우성 기자 morgen@hani.co.kr
유누스 총재가 ‘신나는 조합’ 사무실 앞에 도착해 강명순 조합 이사의 환영을 받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최우성 기자 morge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