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통화기금 추진 일지
전성인 교수 “중국과 일본 갈등 봉합 여부가 관건”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미국 주도 금융질서의 붕괴를 알리는 서막인가?
한·중·일 3국과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회원국은 지난 5일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10차 ‘아세안+3 재무장관 회의’에서 800억달러(약 74조4천억원) 규모의 ‘아시아통화기금’(AMF)을 조성해 역내 위기 발생 때 공동대응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합의는 2000년 5월 마련된 역내 위기 예방체계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를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다. 지금까지의 협력은 역내 어느 한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그 나라 통화를 맡기고 외국 통화(주로 달러화)를 단기 차입하는 통화 스와프 방식에 머물렀다. 하지만 모든 회원국이 반드시 참여하는 단일한 공동기금이 마련되면 그만큼 역내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무엇보다 이번 합의는 미국 주도의 세계 금융질서에서 아시아 지역이 좀더 분명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미국은 그동안 아시아 지역에서 독자적인 금융 협력의 싹이 보일 때마다 이를 꺾어왔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일본이 아시아통화기금 창설을 처음 주장했을 때나, 차앙마이 이니셔티브 논의가 무르익던 2000년 미국은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그 사이 국제 금융시장 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무엇보다 역내 국가들이 보유한 외환 보유액은 엄청나게 불어났다. 3월 말 현재 외환 보유액 상위 1~8위 국가 가운데 러시아(4위)를 빼곤 일곱 나라가 모두 아세안+3 회원국이다. 이들 일곱 나라의 외환 보유액을 모두 더하면 세계 외환 보유액의 3분의 2를 훨씬 넘는다.
중국의 등장도 또다른 변수다. 최석원 한화증권 채권전략팀장은 “일본은 80년대 중반부터 아시아에 엔화 블록을 만들려고 꾸준히 애썼지만, 당시만 해도 미국의 입김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며 “과거엔 일본을 빼면 아시아 지역의 영향력이 보잘 것 없었지만, 이제는 중국을 위시한 역내 시장이 워낙 커져 과거처럼 미국의 반대에 일방적으로 무너지진 않을 것”이라 내다봤다.
지만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베이징사무소장은 “아세안+3 자체는 중국이 가장 선호하는 구도”라며 “중국은 아시아통화기금을 과거 일본이 주도했던 아시아 단일 통화(아쿠)와는 다른 시도로 이해해 상당한 의지를 나타낼 것”이라 내다봤다.
물론 아시아통화기금이 탄생하기까지는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결국엔 역내 패권을 노리는 중국과 일본의 갈등을 어떻게 봉합하느냐가 관건”이라며 “두 나라가 사사건건 맞서고, 여기에 우리나라도 나름의 발언권을 내려 애쓸 게 분명해 미국의 반대를 누를 만큼 단일한 목소리를 모으기는 힘들 것”이라 내다봤다.
전창환 한신대 교수(무역학)는 “아시아통화기금의 성패는 결국 미국 중심의 국제통화기금의 영향력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도 역내 국가들은 지원액의 20%만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지원할 뿐, 나머지 80%에 대해선 국제통화기금(IMF)의 동의가 있을 경우에만 지원에 나설 수 있다. 전 교수는 “아무리 역내 국가들이 남아도는 외환 보유액을 밑천 삼아 아시아만의 공동기금을 마련한다고 해도 지원 과정에서 사실상 국제통화기금의 동의를 전제로 한다면, 찻잔 속 태풍에 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오석태 한국씨티은행 경제분석팀장은 “영향력이 커진 아시아 지역과 이를 견제하는 미국의 의지가 부닥칠 경우, 위안화 절상 압력이 한층 커지면서 단기적으로는 국제 금융질서의 혼란이 더 커질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최우성 기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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