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은 기업들한테 배당에 관해 물어보면 ‘배당은 연말에 경영진이 결정할 내용’이라고 답변을 회피해왔습니다. 이제는 기업들이 ‘알아보고 전달해드리겠다’ ‘주주들이 원하는 건 어떤 것이냐’며 종전보다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투자신탁운용(한투운용)의 스튜어드십 코드 책임자인 이창훈 준법감시인(상무)은 지난 9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투운용은 지난 7월19일 국내 자산운용사 가운데 처음으로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했다. 그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들여온 지 석달 정도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면 아직 가시적 변화가 뚜렷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기업을 방문하는 애널리스트나 운용역들은 현장에서 달라진 기류를 확실히 느끼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1호 자산운용사 가보니
스튜어드십 코드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steward)처럼 고객이 맡긴 돈을 관리하는 기관들이 수탁자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한 지침을 가리킨다. 2010년 영국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최초로 도입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기업을 견제하지 못한 기관투자자들의 책임도 있다는 반성에서 나왔다. 2014년 일본도 도입하는 등 현재 네덜란드, 캐나다 등 10여개 국가가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해 운용 중이다.
국내에선 지난해 12월19일 스튜어드십 코드 제정위원회가 한국판 스튜어드십 코드인 ‘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을 제정했다. 기관투자자들이 기업의 경영 계획에 ‘거수기 의결’만 할 게 아니라, 적극적인 주주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책임을 부여한 7가지 원칙을 담았다. 특히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합병과 관련해 의결권 자문을 받았을 때 반대 의견이 나왔음에도 찬성표를 던져 생긴 의혹 때문에 지난 대선에서 주요 후보들이 ‘스튜어드십 코드’ 활성화를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다.
국내에서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1호 자산운용사인 한투운용은 제도 도입 뒤 의결권 자문 전문기관과 계약부터 맺었다. 과거에는 주로 사내 리서치센터가 기업들의 주주총회 시즌에 ‘추가 업무’로 맡아왔지만 앞으로는 전문인력의 자문을 받아 상세하게 들여다보겠다는 취지였다. 기업이 이사를 선임하는 과정에서도 자격이나 조건 등을 따져봤어야 하는데, 통상 의결권 행사가 특정 시기에 몰려 제대로 보지 못해왔다는 자성도 뒤따랐다. 이창훈 상무는 “기관투자자로서 투자 기업에 의견을 낼 수 있는 범위 등이 좀 더 명확해져 투자자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기업을 감시한다는 원칙에 부합하는 장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산운용업계에선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면 주주활동이 활발해져 경영권에 영향을 주려는 목적으로 해석되는 데 대한 염려도 있어왔다. 자본시장법상 상장사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기관투자자가 ‘경영권에 영향을 주기 위해’ 해당 기업의 지분을 1%포인트 이상 사고팔 때 영업일 5일 이내에 공시를 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통상 임원 선임과 해임, 배당 결정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경영 참여’에 해당된다. 기관투자자 입장에선 주식 거래 내역이 상세히 공개되면 자산운용 전략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부담이 된다. 이 때문에 금융위원회는 지난 6월 “기관의 입장을 표명하거나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것, 기업에 단순히 설명을 요구하는 걸 사실상 영향력 행사로 보기 어렵다”는 유권해석을 내려, 자산운용사들은 공시 위반 등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기관 참여 늘리기 위한 정부의 당근은?
청와대와 관계부처 장관급 고위 인사들은 최근들어 부쩍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이전 정부 때 제정된 원칙이지만 ‘투자자 이익 보호’뿐만 아니라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나 재벌 개혁 과제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재벌 개혁 전도사’인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공식 일정에서 “스튜어드십 코드 확산을 통해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발언으로 지원사격에 나서기도 했다.
다음달로 제도 도입 1년을 맞게 되지만, 아직 기관들의 참여 속도는 더딘 편이다. 현재 참여하고 있는 기관은 13개사에 불과하고 자산운용사는 2곳뿐이다. 연기금은 아직 한 곳도 없다. 따라서 금융권에선 국내 주식 시장에서만 120조원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어떤 방향을 갖고 가느냐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연내 관련한 연구용역 결과가 나오면 내년에 국민연금의 제도 도입이 예상되는 가운데, 금융당국이 기관들에 대한 유인책을 본격적으로 내놓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공적 연기금 위탁에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조건으로 두는 건 강력한 확산책으로 꼽힌다. 금융위는 국민연금과 논의해 공적 연기금 등 공적 기관에서 자산운용 위탁사를 선정할 경우 스튜어드십 코드에 참여하는 기관투자자를 우대하는 방식으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앞서 지난 5월 한국산업은행이 올해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 펀드를 운용할 기관을 공모하면서 스튜어드십 코드 참여 계획을 평가에 반영하겠다고 하자 30곳이 앞다퉈 참여 계획서를 내기도 했다. 일본도 초기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할 때 일본공적연금(GPIF)을 활용했다. 일본공적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조기 도입하면서 금융기관 전체로 확산됐다. 도입 기관은 2014년 초 127곳에서 2016년 말 214곳으로 68.5% 증가했다.
연기금 주도로 참여 기관 수를 늘리더라도, 제도 도입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선 또다른 후속 조처가 필요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시연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한 기업 안에서 다양한 주주들의 이해가 서로 상충할 수 있고 어떤 주주의 이익에 부합하는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 때문에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해도 반드시 기관 투자자의 적극적 의결권 행사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차익 실현을 목적으로 주식을 단기 보유할 때는 결과적으로 안건 분석 비용만 높아질 수 있어 기관 투자자들의 적극적인 관여 동기가 약화될 수도 있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정부의 강력한 스튜어드십 코드 드라이브가 시장에선 ‘배당주’와 ‘배당주 펀드’ 등에 대한 관심으로도 쏠리고 있다. 일본의 경우,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일본 기업 전반의 주주환원 정책 강화로 이어졌다. 일본 토픽스 기업 배당성향은 2014년 초 26.1%에서 2016년 말 30.3%로 상승했다. 배당 수익률은 2014년 초 1.67%에서 2016년 말 1.95%로 0.28%포인트 개선됐다. 노동길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일본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주주환원 정책 강화로 이어지고, 고배당 종목들의 초과 수익이 뚜렷했다”며 “특히 국민연금이 이르게 도입한다면 한국도 비슷한 길을 따라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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