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차명계좌에 대한 과징금 부과 여부와 관련해, 법제처가 과징금 부과 대상이 아니라는 금융위원회 입장을 180도 뒤집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1993년 8월 금융실명제 시행 뒤 두달간의 자진신고 기간 중 자금의 실소유주가 아닌 타인의 실지명의(실명)로 전환한 차명계좌에도 과징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게 뼈대다. 금융실명제 시행 이전에 개설된 이 회장의 차명계좌 27개가 과징금 부과 대상이라는 것이다.
법제처는 12일 “1993년 8월12일 금융실명제 실시 이전에 자금 실소유주를 위해 타인이 자신의 명의 또는 가명으로 개설한 계좌를 (실명제 실시) 직후 실명전환의무 기간(2개월) 내 타인 명의로 실명전환했으나, 1997년 12월 금융실명법 도입 이후 실소유주와 계좌 명의인이 다른 사실이 확인된 경우에는 실소유자는 계좌를 자신의 실명으로 전환하고 금융기관은 과징금을 원천징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발표는 앞서 지난달 2일 금융위원회가 이건희 회장의 차명계좌에 대한 과징금 부과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지속되자, 법제처에 유권해석을 의뢰한 데 따른 것이다.
이런 법제처 해석은 금융위의 종전 유권해석과는 정반대다. 금융위는 ‘1993년 자진신고 기간(실명전환의무 기간) 동안에 타인 명의로 계좌 주인이 바뀌었다면 그 자체로 실명계좌로 볼 수 있어, 과징금 부과 대상이 아니다’라고 밝혀왔다. 최종구 금융위원장도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같은 주장을 편 바 있다.
법제처 해석은 그동안 이 회장 차명계좌에 과징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여당의 손을 들어준 것이기도 하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날 입장문을 내어 “(법제처의 해석은)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의 승리이자 재벌 개혁을 간절히 바랐던 국민의 승리”라며 “(그간 과징금을 부과하지 않은) 금융당국의 책임은 반드시 따져묻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제처 유권해석에도 불구하고, 실제 이 회장에게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을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지난 2008년 삼성특검과 금융감독원 특별검사로 드러난 이 회장 차명계좌 1229개 가운데 27개가 금융실명제 시행 이전에 개설된 뒤 타인(임직원) 명의로 전환된 계좌인데, 과징금 산정기준일인 1993년 8월12일 당시 거래 기록이 모두 폐기된 터라 해당 계좌에 들어 있던 금융자산 규모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2007년 12월말 기준으로 27개 계좌에 든 금융자산은 965억원이다. 이날 금융위가 보도자료를 내어 과징금 부과 등에 대한 언급 없이 “(법제처 해석에 따라) 금융실명제 실무 운영상 변화 등은 국세청·금융감독원과 공동 태스크포스를 꾸려 대응해 나가겠다”고만 밝힌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날 나온 법제처 유권해석은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 이후 개설된 이 회장의 1202개 차명계좌는 물론이고 씨제이(CJ) 등 다른 재벌그룹 총수의 차명계좌에도 과징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확산되거나 금융실명법 개정 논의로 이어질 공산도 있다. 박용진 의원 쪽은 “1993년 이후 개설된 차명계좌에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금융실명법 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라며 “과징금 산정 기준일을 실명전환 시점으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