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버시의 종말]
국가·기업 정보권력 넘어 개인간 사찰 ‘일상다반사’
국가·기업 정보권력 넘어 개인간 사찰 ‘일상다반사’
디지털 시대에 정보를 만들어 유통하고 보관하는 매트릭스(기반)가 근본적으로 변한 것과 더불어 프라이버시에도 중요하게 바뀐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사생활 침해가 일어나는 영역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공공 부문과 비즈니스 부문에 이어 개인 사이에 생기는 프라이버시 침해는 그 발생 구조와 해결 방법이 서로 다르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국민 대다수에 대한 프라이버시 침해가 더욱 자주,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그 피해 역시 수습 불가능한 형태로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12월 이름, 아이디, 비밀번호 등 2900만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돼 네이버·다음 등의 수백만 이용자 계정이 노출된 일이 벌어졌다. 여러 해 전부터 국민의 개인정보가 수백만건씩 파일로 만들어져 거래되고 있는 현실에서 주기적으로 만나는 현상이다.
국가 차원에서 국민 개인정보와 프라이버시에 대한 설계를 잘못 한데다, 이로 인한 부작용을 대비해오지 못한 게 주된 원인이다. 불법적으로 취득한 대량의 개인정보를 이용한 범죄가 끊이지 않는 데에는 국내 특유의 정보 현실이 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전국민에게 부여돼 평생 바뀌지 않는 주민등록번호가 지속적인 국내 개인정보 침해 사고의 핵심적 배경이다. 전세계에서 유일한 전국민 식별번호인 주민번호는 거주지, 전화번호, 사이트 아이디, 비밀번호 등 수많은 정보를 정리하는 ‘불변의 기준점’이다. 이미 전국민 주민번호와 이름, 이에 연결된 각종 사이트 아이디와 비밀번호, 주소 등은 중국 등 국외에 유출돼 헐값에 대량 거래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행정 효율화를 내세워 각급 공공기관이나 단체가 보유해온 개인정보가 드물지 않게 유출되고 있으며, 이는 인터넷에 있는 정보와 결합해 곧바로 민감한 프라이버시 침해로 이어진다. 수많은 폐쇄회로 카메라와 유료도로 결제정보 등 공공 부문이 보유한 정보 역시 ‘인화성 폭발물’에 가깝다.
이뿐이 아니다. 고객들의 데이터베이스를 확장하고 이들에게 ‘맞춤 광고’처럼 사용자별 행태에 입각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기업들의 시도는, 자신의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하고 혜택을 받으려는 고객들의 의사에 힘입어 민감한 내용의 프라이버시 정보 집적으로 이어진다.
공공과 기업에 이어 새로운 프라이버시 위협으로 떠오르는 문제는 인터넷을 이용해 개인들이 손쉽게 누군가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행위를 저지른다는 점이다.
장여경 진보넷 활동가는 “그동안에는 국가 권력이나 자본 권력이 힘없는 개인을 사찰하는 것이 주로 문제였으나, 이제는 이용자가 스스로를 인터넷에 노출하는 상황에서 개인이 개인을 사찰하는 것도 가능해졌다”며 “근본적 패러다임이 달라진 만큼 프라이버시 보호에 관한 사회적 합의와 해법 모색 또한 매우 복잡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구본권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