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환경에 힘입어 생겨난 수많은 스타트업에는 혁신적 아이디어로 무장한 창업자뿐 아니라 새로운 무대에서 꿈을 펼쳐 보이려는 수많은 청년이 모여든다. 이들에겐 미래(꿈)와 오늘(고민)이 공존한다. 민간 비영리기관인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데이터 조사·분석기관 오픈서베이와 공동으로 펴낸 ‘스타트업 트렌드 리포트 2020’은 이들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조사 대상 스타트업 종사자의 절반 가까이가 현 상황에 ‘만족’(38.0%) 혹은 ‘매우 만족’(7.6%)한다고 응답해, ‘불만족’(13.6%) 혹은 ‘전혀 불만족’(0.8%)이라는 답변을 크게 웃돌았다. 반면, 이들은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조직문화’(38.4%)를 최고의 장점으로 꼽으면서도 ‘급여 등 복리후생’(32.4%)을 가장 큰 불만 이유로 들었다.
<한겨레>는 국내 주요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20·30대 직원 12명을 만나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봤다. 이름은 모두 가명처리했다.
“워라밸? 워크가 곧 라이프!”―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이유
양희원(28)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던 삼성 관계사 재직 2년 동안 정말 답답했어요. 본사에 납품을 하는 작은 회사에선 본사가 시키는 대로만 일해야 했어요. 열심히 일하면 욕심이 많다고 눈총을 받았죠. 스타트업에선 야근을 밥 먹듯 하지만 회사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있어서 힘들지 않아요.”
김한솔(31) “재미없는 대기업엔 가지 말아야지 생각하던 차에, 한 스타트업의 창립 멤버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3년 반 일해보니, 솔직히 급여는 좀 부족하지만 부족한 연봉을 채우고도 남는 성취를 경험했어요. 처음엔 한달 월급이 고작 70만원이라 학자금 대출, 전세보증금 대출을 감당하느라 무척 힘들었죠.”
김지원(26) “평생 대기업 직원으로 일한 엄마를 보면서 대기업의 복지 혜택을 실감했어요. 엄마 회사 덕분에 제 대학 학자금이 모두 해결됐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복지가 좋아도 자유롭게 일할 수 없으면 힘들 것 같았어요.”
박영현(28) “원래 방송국 피디가 되고 싶었지만 공채의 벽이 너무 높았어요. 취업 준비를 오래 하긴 부담스러워서 자의 반 타의 반 스타트업에 왔죠. 후회는 없어요. 방송국에서 일했다면 영수증 정리만 했을 시기에 유명 연예인을 직접 섭외해서 대박 콘텐츠도 만들어봤거든요. 주변에서 스타트업 취업을 고민하면 적극 권유하고 있어요.”
경영능력 부족에 ‘주먹구구’ 업무―이런 점은 아쉽더라
양희원 “솔직히 맨 처음 일했던 스타트업에선 예전 일반 직장 다닐 때보다 더 힘들었어요. 대표는 툭하면 직원들에게 ‘펀딩이 바닥났다’ ‘매출이 안 나온다’고 짜증을 부렸어요.”
정소희(33) “한동안 월급을 못 받았어요. 한 대기업이 수십억원을 투자했대서 고민 끝에 갔던 스타트업이었는데 4개월 만에 월급이 끊겼어요. 회사 쪽은 이유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죠.”
이경진(32) “예전에 다녔던 회사는 매출을 못 내다가 문을 닫았어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리더가 원하는 이상향과 실제 역량의 간극이 컸던 게 문제였어요.”
양희원 “스타트업이 망해버리면 이직이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성과가 없으니까요. 나는 첫번째 스타트업을 나오기로 마음먹고 업무 역량을 내세울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았어요. 일하면서 배우고 느낀 점을 글로 남겨서 포트폴리오를 만들었고 다음 직장을 잡는 데 필요한 사이드 프로젝트도 병행했죠.”
김정아(30) “요즘 이직이 고민이에요. 지금 다니는 육아 스타트업이 사업모델을 못 찾고 있어서요. 성과 없는 회사에서 일했던 시간을 어떻게 의미 부여 할지 고민이 커요. 일단은 ‘초기 스타트업에서 일해본 사람’이나 ‘책임감을 갖고 일했던 사람’을 찾는 공고를 눈여겨보고 있어요. 실패한 회사에서 버텼다는 것을 ‘멘탈 관리 능력’이나 ‘책임감’으로 설명해보려고요.”
임현영(33) “많은 스타트업이 ‘스타트업 놀이’에 빠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종종 들어요. 일을 하다 문제가 생기면 빨리 수습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스타트업이니까 시행착오를 해도 괜찮아’ 식의 생각에 안주하더라고요. 결정권자가 톱다운 방식으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무조건 ‘대기업의 꼰대스러움’이라고 치부할 때도 많아요. 나는 9년 동안 대기업 여러 곳을 거쳤는데, 성숙한 회사들이 이미 겪고 결론 내린 것을 스타트업이 강박적으로 거부하면서 너무 많은 비용을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계약과 관련해서도 ‘이게 과연 합리적인가?’ 의구심이 들 때가 많아요. 대기업은 새로운 업체와 계약을 맺을 땐 이해관계가 없는 최소 3인의 동의를 받아서 진행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규칙이 있지만 스타트업은 이런 체계가 없죠. 그렇다 보니 인맥, 사심에 의해 결정되는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배윤경(29) “전 직장(스타트업)에서 ‘탈출’한 이유가 창업 멤버들의 친목질 때문이었어요. 동아리에서 발전한 스타트업이라 채용도 아는 사람을 우선시하더라고요. 업무 평가도 성과보단 친소 관계로 판단하고. 지금도 ‘누구 선후배’ ‘누구 지인’이 아니면 얼마 못 버티고 떠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어요.”
송재원(34) “일하면서 보고 배울 만한 좋은 선례가 없는 점이 아쉬워요. 대기업에서 일할 땐 참고할 만한 소스가 많았거든요. 하지만 요즘은 내가 직접 좋은 선례가 되기로 관점을 바꾸고 일하고 있어요.”
김소영(21) “휴학생 신분으로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건 너무 만족스러워요. 노력한 만큼 전부 내 경력이 되니까요. 정식 취업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망설여지는 딱 한가지 이유는 돈 때문이에요.”
윤고은(29) “기회가 되면 대기업으로 옮기고 싶어요. 주니어 직원끼리 일하다 보니 일의 끝맺음이 서툴러서 힘들었거든요. 뛰어난 ‘사수’가 있는 곳에서 제대로 일을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요즘은 대기업도 예전처럼 딱딱한 분위기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정소희 “전통 산업도 요즘 변화를 시도하고 있으니까, 굳이 스타트업이 아니더라도 제 자리에서 얼마든지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임현영 “대기업의 지분이 들어와 있는 스타트업에 가고 싶어요. 그런 회사는 놀이가 아니라 객관적인 시장 논리를 따라가며 실전처럼 일할 것 같아요. 스타트업이 미덥지 못한 부분도 많지만 대기업으로 갈 생각은 전혀 없어요.”
김한솔 “내가 직장을 선택하는 기준은 두 가지예요. ‘대표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회사인가?’ 이걸 충족시켜주는 회사라면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나 자신과 조직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하고 싶어요. 없다면 그런 회사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어요.”
최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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