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제재 카드로 러시아산 원유 수입금지 조처를 검토하면서 국제유가가 급등하자 국내 산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정유·석유화학 기업과 항공업계가 고유가에 따른 비용 상승분을 고스란히 떠안을 가능성이 크다. 정유·석화기업은 원유 등을 원료로 투입해 석유·석화제품을 생산하고, 항공사는 코로나19 여파로 여행수요가 여전히 바닥을 찍고 있어서다.
8일 <한겨레>의 취재를 종합하면, 정유업계는 이번 고유가 상황이 장기간 지속될 상황에 대비해 대응 전략 수립을 서두르고 있다.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정제마진 하락에 이은 가동률 하락이다. 정제마진은 석유제품 판매가에서 원유 가격을 뺀 수치로, 정유사 수익의 가늠자 역할을 한다. 원료비(유가) 인상과 석유제품(휘발유·경유 등) 수요 감소가 동시에 일어나는 상황이다. 비용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반영하기 어렵게 된다.
특히 전 세계 정유사들이 러시아산 원유 대신 중동·미국·동남아 등 원유 도입 다변화를 추진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원유 판매가에 프리미엄이 붙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전 세계 2위 원유 수출국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최악의 경우 정제마진이 마이너스로 급하락할 가능성까지도 예상되고 있다”고 말했다. 3월 첫째주 정제마진은 배럴당 5.7달러로, 2월 넷째주 정제마진 6.9달러에서 1달러 이상 하락했다. 정유사는 정제마진이 4달러는 넘어야 손익분기점을 맞춘다.
정제마진이 악화하면 정유공장 가동률을 낮춰야 할 수도 있다. 한 정유업체 관계자는 “정유사는 2∼3개월 전에 원유 도입을 확정하기 때문에 당장 가동률을 낮추지는 않겠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적어도 5월부터는 공장 가동률을 낮춰야 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석유화학 기업들도 분주하다. 플라스틱 등 석유화학제품 원료인 나프타 가격이 치솟고 있어서다. 나프타는 원유를 정제해 뽑아낸다. 이달 첫째 주 나프타 가격은 톤(t)당 1112달러로 주간 기준 22.1% 상승하면서 엘지(LG)화학과 롯데케미칼 등 나프타분해시설(NCC)을 보유한 기업들의 부담이 늘어날 상황에 처했다. 국내 석유화학업체 관계자는 “한국은 국내 도입 나프타 중 20%를 러시아에서 받아오고 있다. 업체들이 수입 다변화를 시도하면서 자연스럽게 전 세계 나프타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국제선 여객 수요 회복이 아직 요원한 항공업계도 유가 상승 직격탄을 맞고 있다. 항공유 가격이 오르면서 손실이 늘어나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유가가 1달러 바뀔 때마다 각각 약 3천만달러, 1800만달러의 손익변동이 발생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국제선은 거의 텅 빈 채로 운항 중이다. 승객이 꽉 찬다면 유류 할증료를 올려서 고객과 분담할 수 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유가 상승분이 고스란히 항공사 몫이 된다”고 말했다.
국내선 위주로 운항 중인 저비용항공사들은 유가 상승으로 고속철도(KTX)에 고객을 빼앗길까 우려하고 있다. 저비용항공사 관계자는 “유가가 오르면 고객이 부담하는 유류 할증료가 오른다. 제주도를 제외한 국내 노선 여객이 케이티엑스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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