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사옥 앞에 있는 표지석. 페이스북은 옛 썬마이크로시스템즈 건물을 사옥으로 쓰고 있는데, 안주하다 망한 썬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표지석 앞 부분은 페이스북으로 바꾸고 뒷면은 그대로 두고 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엘지시엔에스(LG CNS)의 주력사업은 시스템통합(SI)이다. 하지만 요즘은 친환경 발전 사업에 더 공을 들이고 있다. 태양광·풍력 발전기 설치·운영과 쓰고 남은 전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쓸 수 있게 하는 ‘에너지 저장 시스템’ 구축·운영 사업에 매달리고 있다. 이미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잇따라 사업을 따내고 있다. 이 업체는 “시스템통합 사업을 하며 쌓은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클라우드 서비스와 빅데이터 시장에 뛰어든 데 이어 친환경 발전과 에너지 저장 시장까지 넘보는 것”이라며 “모두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최대 인터넷 검색·포털 사업자인 네이버는 요즘 완전히 새로운 영역인 자율주행차 기술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이미 시험 운행용 차량 제작까지 마쳤고, 실제 도로를 운행할 수 있는 면허도 받았다. 자율주행차로 도로 운행을 하고, 자동차 전시회에도 참가하고 있다. 네이버는 자율주행차에 관심을 쏟는 이유에 대해 “자율주행차는 스스로 알아서 주행을 해, 핸들·엑셀레이터·브레이크 조작 등이 필요없게 된다. ‘자동차 안의 풍경이 어떻게 바뀌고, 손과 발이 자유로워진 운전자는 자동차가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라는 질문을 갖게 됐다. 잘 하면 엄청난 새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들이 새로운 먹거리 확보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다. 전략도 제각각이다. 포스코 등은 인공지능(AI)·빅데이터 기술과 ‘기가스틸’이란 이름의 차세대 강판으로 기존 사업을 혁신해 신성장동력으로 삼는 전략을 펴고 있고, 통신사 등은 기존 사업을 해오면서 쌓은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내고 있다. 엘지 계열사들은 자동차 부품과 친환경 에너지 등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고 있다.
전례없는 영업이익을 기록하는 등 이른바 ‘잘 나가는’ 기업이 새로운 먹거리 확보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띈다.
“기존 사업에 안주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훅 가는 기업을 자주 본다. 소름이 끼친다.” 한 중견기업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의 말이다.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도시바가 매물 신세가 될지 상상이나 했느냐? 시장의 변화를 앞서 예상해 대비하고 신성장 산업의 흐름을 타지 못하면, 잘 나가는 대기업들도 언제든지 도시바 같은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두려움이 사업이 번창할 때일수록 혁신과 새로운 먹거리 확보를 외치게 만든단다.
엘지시엔에스(LG CNS)가 일본의 한 골프장에 설치한 태양광 발전 설비 모습. 엘지씨엔에스 제공
애플의 ‘아이폰’이 대박을 쳐 휴대전화 시장을 스마트폰 중심으로 바꾸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 휴대전화 시장점유율 1위 업체는 노키아였고, 삼성전자·모토롤라·엘지전자·팬택 등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몇년 사이에 이 중 노키아·모토롤라·팬택이 사라졌고, 엘지전자마저도 경쟁력이 크게 뒤처졌다.
이런 상황은 앞서 닷컴 붐이 일었다가 꺼질 때도 벌어졌다. 이 때는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이하 썬)와 라이코스 등이 사라졌고, 야후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로 전락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니홈피’와 ‘도토리’로 유명했던 에스케이커뮤니케이션즈가 떴다가 꼬꾸라지는 등 수많은 기업들이 ‘성공한 벤처신화’로 꼽혔다가 사라졌다.
기존 사업을 시장의 변화에 맞춰 혁신하고, 산업의 주기를 살펴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노력을 게을리한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실제로 노키아와 모토롤라는 스마트폰 시대를 준비하지 못해 제대로 된 신제품 출시조차 못해보고 사라졌다. 팬택은 발빠르게 따라갔으나 시장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대우종합기계를 인수해 가정용 로봇 시장에 진출하는 전략으로 살아남으려고 애쓰다 실패하면서 무너졌다.
썬의 사례는 많은 기업에서 ‘타산지석’으로 삼고 있다. 서버(고성능 컴퓨팅 및 데이터 저장·관리용 컴퓨터)를 만들어 공급하는 사업을 주력으로 하던 썬은 1990년대 후반 신성장동력으로 소프트웨어 사업을 꼽았다. 지금의 구글과 오라클 같은 기업을 꿈꾼 것이다. 이를 위해 소프트웨어 인재들을 대거 영입하는 등 투자를 강화했다. 때마침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 개발자들이 대거 이탈하고 있었다.
썬의 전략은 바로 성과를 냈다. 소프트웨어 인재들이 몰려들었고, 머지않아 ‘자바’란 이름의 객체 지향형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들어냈다.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회사인 엠에스가 썬을 최대 경쟁자로 꼽아 ‘썬번’(썬을 태워죽이자는 구호)을 외칠 정도로 썬은 잠재력을 보였다. 엠에스 직원들은 썬의 자바 프로그램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자바 커피를 안 마시고, 썬은 시애틀커피(엠에스 본사가 위치한 시애틀 이름을 담은 커피 이름)을 안 마신다는 우스개소리가 돌기도 했다.
그런데 닷컴 붐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서버에 대한 주문이 급증했다. 스콧 맥닐리 창업자를 포함한 썬의 경영진은 ‘시험’에 빠졌다. 결국 썬의 경영진은 소프트웨어 회사로 변신하는 전략을 뒤로 미루고 서버 사업으로 재미를 보는 선택을 했다. 이에 실망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회사를 떠났고, 이후 닷컴 붐이 꺼지자 썬은 몰락했다.
기존 사업에 안주해 사업구조 혁신 및 새로운 먹거리 확보 노력을 게을리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썬의 경영진이 잘못된 선택을 한 덕에, 구글이 썬에서 이탈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흡수해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의 운명은 대개 시장의 흐름이 급격하게 바뀌거나 새로운 산업이 등장할 때 갈린다. 시장의 변화나 새 산업의 등장에 대비한 업체들은 이를 기회로 삼는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고, 스마트폰 시장의 흐름에 발빠르게 대응해 성장의 기회로 삼은 게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삼성전자는 요즘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자율주행차 등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를 통해 기존 반도체·스마트폰·가전사업을 혁신하고,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토대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미 클라우드 방식의 인공지능 서비스 ‘빅스비’를 통해 구글과 아마존 등의 텃밭으로 꼽히던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삼성전자가 개발하는 기술이 100가지라면, 그 가운데 상용화되는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사실 엠에스·구글·오라클·애플이 내놓는 소프트웨어를 삼성전자도 대부분 개발하고 있다. 이를 두고 ‘되지도 않을 것을 왜 개발하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렇게 축적한 기술 덕분에 삼성전자가 어떤 흐름에도 발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내공을 가질 수 있는 거다”고 말했다.
이동통신 회사들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가계통신비 부담 완화 요구로 머지않아 ‘황금알 낳는 거위’ 시대가 끝날 것으로 예상해 새로운 먹거리 찾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위 사업자인 에스케이텔레콤(SKT)은 하이닉스를 인수해 반도체 시장에 진출한 데 이어 자회사인 에스케이브로드밴드(SKB)를 통해 콘텐츠 시장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고, 케이티(KT)는 비씨카드를 인수하고 인터넷뱅킹 업체를 설립하는 등 금융시장으로 발을 넓히고 있다. 케이티는 부동산 개발·임대와 에너지 효율화 사업도 벌이고 있다.
통신사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이미 ‘탈통신’을 외치기 시작했다. 최태원 에스케이(SK)그룹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에스케이텔레콤 사장에게 이동통신 사업에 안주하는 회사 분위기를 깨 임직원들이 새로운 먹거리 확보에 적극 나서게 하라고 주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차, 전기차…. 시장을 바꿀 새로운 흐름들이다.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등은 모든 기존 질서를 바꿀 것으로 보이고, 자율주행차·사물인터넷 등은 기존의 모든 기득권을 파괴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흐름 앞에서 ‘업계 1위’는 별 의미가 없다. 바람 앞에 놓인 촛불의 불꽃처럼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
기업들의 혁신과 새로운 먹거리 확보 움직임은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국가의 주력산업을 바꾼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이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스마트폰을 우리나라의 주력산업으로 만든 것처럼, 앞으로는 인공지능·자율주행차·사물인터넷 등이 우리나라의 경쟁력을 높이고 새로운 주력산업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김재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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