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 기간 고용을 유지하는 대가로 정부의 보조금과 금융지원을 받은 미국 주요 항공사들이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여행 수요가 단기간에 회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자 고용유지 의무 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맞춰 감원하려고 일찌감치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올해 하반기 업황에 따라 40조원 규모의 국내 기간산업안정기금(기안기금)을 두고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4일 <파이낸셜 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 등을 종합하면, 지난달 27일(현지시각) 미국 최대 항공사 아메리칸항공은 경영·지원부서 직원 1만7천여명 중 30%에 이르는 5100명을 해고하기로 했다. 우선 명예퇴직 신청을 받되 지원자가 충분하지 않으면 정리해고를 할 계획이다. 엘리스 어버윈 부사장은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예측 가능한 미래를 위해 우리는 더 작은 항공사를 운영해야만 한다”고 밝혔다. 델타항공은 지원부서뿐만 아니라 조종사와 승무원까지 9만1천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을 예정이다. 이 두 항공사는 코로나19 관련 경기부양 패키지인 ‘케어스 액트’(CARES Act)에 따른 항공사 지원 조건 때문에 10월1일 이전까지 고용총량의 90%를 유지해야 한다. 이에 항공사들은 9월 말까지는 정상적으로 급여와 복지 혜택을 제공한 뒤 감원한다는 계획이다. 아메리칸과 델타항공은 각각 58억, 54억달러를 지원받았다.
심지어 일부 항공사들은 ‘꼼수’ 논란을 빚기도 했다. 지원 조건 중 하나인 노동자 임금 유지와 관련해 유나이티드항공 등 몇 개 항공사가 근무 시간 단축으로 실질적인 임금 삭감 효과를 내자, 미국 의회에서는 “이는 법 취지와 다르다”며 재무부에 정확한 법 해석을 요구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우선 항공·해운업 등 기간산업을 중심으로 지원하기로 한 기안기금도 미국과 유사한 전철을 밟을 여지가 있다. 지난 4월22일 정부가 조성하기로 발표한 기안기금안은 미국의 케어스 액트를 기본 뼈대로 삼았다. 기안기금 근거를 담은 산업은행법이나 시행령에 고용총량 수준 등을 못 박지는 않았지만, 정부가 지난달 20일 발표한 가이드라인(운용방안)에 따라 지원대상 기업은 기금을 받기 시작한 날로부터 고용 인원 90% 이상을 6개월간 유지해야 한다. 업황이 쉽게 호전되지 않으면, 국내 항공사들도 6개월 완료 시점에 맞춰 감원 등 구조조정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노동계가 “기업이 고용을 유지해야 할 기간은 6개월에 불과한 등 고용 안정의 실효성도, 기업이 져야 할 상응 의무도 모호하다”며 기금운용안을 비판한 이유다.
항공 수요와 관련해선 ‘우울한 전망’이 여전하다. 지난 5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전 세계 항공수요가 내년엔 2019년의 75%가량 회복하고, 2023년이 돼야 2019년 수준을 회복할 것으로 전망했다. 더딘 회복세 탓에 항공사들이 일찍 인력 감축을 한다면, 정부가 대기업에 돈만 대고 기안기금의 정책 목표인 고용안정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올 공산이 큰 셈이다.
그렇다고 고용유지 기간을 무작정 ‘6개월 이상’으로 늘리기도 어렵다는 게 정부가 처한 딜레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기업이 경영상황을 1~2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고용유지 기간만 늘릴 경우 이 조건이 부담스러워 기안기금 자체를 신청하지 않을 수 있다”며 “미국과 같은 사례가 발생한다면 또 다른 조건을 부과하는 것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각계 추천으로 구성된 기안기금운용심의위원회(기금위)에서는 이날 본격적으로 기안기금 운용 등과 관련해 논의를 시작했다. 기금위의 한 위원은 사견을 전제로 “고용유지 기간을 더 늘려 잡거나 하청업체에 대한 책임 등에 따른 계획을 강조하는 기업이 있다면, 기금위에서도 금리 혜택 등의 차등화된 인센티브를 주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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