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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산업·재계

날개 꺾인 ‘항공산업 도시’ 사천…부품업체 “공장 문닫을 판”

등록 2020-06-26 05:00수정 2020-06-26 16:44

항공업 종사 1만명 사천 가보니
코로나 탓 항공사 투자 잇단 중단
부품 제조 협력업체 일감 확 줄어
노동자 단축근무·순환휴직 내몰려
공장 창고엔 원자재·완성품 수북
부품 수출액 1년새 반토막 났지만
정부지원 못받고 은행대출도 난망
비대위 “특별고용지원업종 지정을”
지난 18일 경남 사천 하이즈항공 공장에 완성된 항공기 부품이 출고되지 못하고 박스째 쌓여있다. 이 업체는 완성 부품을 쌓아둘 장소가 부족하자 빈 공장을 빌려 부품을 보관 중이다.
지난 18일 경남 사천 하이즈항공 공장에 완성된 항공기 부품이 출고되지 못하고 박스째 쌓여있다. 이 업체는 완성 부품을 쌓아둘 장소가 부족하자 빈 공장을 빌려 부품을 보관 중이다.

아침엔 공장에서 항공기 부품을 도장하고, 저녁엔 동네 중화요릿집에서 배달한다. 일주일에 한번은 했던 외식을 끊었고, 한달에 60만원씩 넣던 적금을 해지했다. 경남 사천의 항공기 부품업체에서 일하는 정규호(31·가명)씨가 이달 들어 공장에서 하루 6시간씩 일하게 되면서 바뀐 일상이다. 한창 일감이 많던 2018년엔 야근도 하고 토요일에도 출근해 잔업을 했다. 세후 200만원 넘게 받던 월급은 이달 130만~150만원 안팎으로 쪼그라들 예정이다. 정씨가 퇴근 뒤 2~3시간씩 배달 알바를 뛰게 된 사연이다.

인구 11만명의 사천시에 항공업 종사자는 1만명가량(53개 업체)이다. 이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정씨처럼 ‘투잡’에 나서고 있다. 사천은 국내 전체 항공제조업 생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곳이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카이)이 지난 2005년 본사와 창원공장을 사천으로 옮긴 뒤, 그 주변에 협력업체들이 모여들면서 산업단지 모양새가 됐다. 카이와 연계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외국 제조사와 수주 계약을 맺고 코스닥 상장까지 이뤄낸 기업도 등장했다. 이런 성장을 배경으로 2017년부터 25만평 규모의 ‘경남 항공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만에, 이 곳은 최악의 불황에 맞닥뜨리고 있다.

사천의 중소업체와 노동자들은 코로나19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번지며 도미노처럼 스러지고 있는 항공업 생태계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다. 코로나19가 비행기를 멈춰 세우자, 항공사들은 추가 항공기 도입 등 투자를 잇달아 중단했다. 세계 최대 항공기 제조사 보잉이나 에어버스 등도 새 일감이 뚝 떨어졌다. 지난 4월 보잉의 수주 실적은 문자그대로 ‘제로’였다. 완성된 항공기의 인도 시점을 미루는 경우도 있다. 사천의 공장들이 멈춰설 수밖에 없게 된 배경이다.

항공산업단지 사람들은 단축근무와 무급휴직, 셧다운, 고용유지지원금이라는 단어들과 급속히 가까워졌다. 코로나19가 덮치기 전엔 저녁 7~8시는 돼야 사천 항공산업단지 내 좁은 2차선 도로에 갓길 주차해둔 차량이 빠지기 시작했지만, 잔업이 사라진 요즘엔 오후 5시면 거리가 한산하다.

수출 통계는 이들 업체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한국무역협회가 집계한 지난 5월 국내 항공기 부분품 수출액은 8천만달러로, 지난해 5월과 견줘 52% 감소했다. 4월엔 감소폭이 43%였다. 사천 업계는 연간 기준 매출은 지난해의 반토막이 될 것으로 내다본다.

공장 안은 원자재와 완성 부품으로 가득차 있다. 알루미늄 등 원자재의 안정적 수급을 위해 통상 4~5년 단위로 장기계약하는 터라, 일감이 줄었다고 계약을 깰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올해 연말까지 만들 부품까지 앞당겨 만들었지만 미국이나 일본 등 현지 공장에 넘겨주지 못하고 있다. 현지에서 “공장 문을 닫아 받을 사람도 없다”고 해서다. 이에 사천의 하이즈항공은 보잉사 항공기의 날개 동체 부품 등을 쌓아 둘 공간이 없어 빈 공장을 빌려 창고로 쓰고 있다. 지난 18일 <한겨레>와 만난 공장 책임자 곽병천 전무는 “항공기 15대분 부품이 쌓여있다”며 창고에 층층이 쌓인 상자들을 보여줬다. 이 회사는 전체 직원 500여명 중 150명씩 한달간 순환휴직 중이다. 곽 전무는 “지난해까지 한달에 최대 14대 분량까지 만들었지만 지금은 8대로 절반가량 줄었다”며 “8월엔 공장 문을 닫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감은 줄고 재고는 쌓여 있는데, 원자재 대금과 월급 등의 비용은 나간다. 당장 유동성 문제를 겪는 일부 업체는 한두달 안에 도산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사천엔 돌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신용도도 떨어져 은행 돈 빌리기도 쉽지 않다. 위기가 길어지며 나타날 인력 유출도 근심거리이다. 이 업체 김광엽 부사장은 “지난 10년간 보잉이 요구하는 부품의 품질과 납기일 등을 99.9% 맞춰 보잉으로부터 ‘골드’ 등급을 받았다”며 “품질엔 자신 있지만 숙련된 직원들이 빠져나가면 일감이 늘어나도 안정화할 때까지 큰 고통이 따르게 된다”고 말했다. 사천시는 지난 23일 기준 항공업체 노동자 가운데 159명이 권고사직 등으로 이미 회사를 떠난 것으로 파악했다. 항공업계 생태계에 묶여 있더라도 현행 산업은행법 시행령에 따라 기간산업안정자금 지원 대상 업종인 ‘항공운송업’에 속하지 않는 터라 이곳 부품사들은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한다. 이에 부품업체들은 코로나19 확산세가 잦아들면 항공사는 매출이 즉각 반등하지만 항공제조업 분야는 회복이 더디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살아남은 항공사들이 새 항공기보다도 중고 항공기부터 소화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지난 5월 사천 지역 부품업체 30곳이 중심인 ‘항공산업 생존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는 정부에 기간산업안정자금 지원과 특별고용지원업종, 고용위기지역 지정 등을 건의했다. 내년까지 30곳 업체 2천억원 가량의 대출 상환 유예도 요구했다. 노동자들로 구성된 항공산단노동자연대도 항공제조업에 대한 특별고용지원업종 지정이 시급하다고 보고 있다. 비대위 회장 황태부 디엔엠항공 대표는 “.대한민국 부품업계가 사라지면 보잉과 에어버스부터 여객기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며 “코로나19로 인한 전 세계적인 항공산업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사천/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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