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신병들. 전투복 차려입으라구!”
얼음공주 ‘스노우퀸’이 호버보드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용암강과 얼음협곡의 장애물을 피하면서,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외눈박이 악당들까지 잡아들여야 한다. 불꽃머리 ‘파이어 슈퍼히어로’와 꽃게모양 ‘크랩’ 등 주인공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미국의 아킬리 인터랙티브랩사가 만든 ‘인데버 아르엑스’(endeavor RX)는 신나는 어린이용 게임 같지만, 지난 6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겪는 8~12살 어린이 치료용으로 승인한 첫 게임 형식 ‘디지털 치료제’이다. 호버보드를 조종하면서 악당을 잡으면, 치료에 필요한 특정 신경회로가 자극되도록 설계됐다. 치료제인 만큼 의사 처방전도 필요하다. 에디 마투치 아킬리 인터랙티브랩 최고경영자는 미국 방송 <에이비시>(abc)와 한 인터뷰에서 “공상과학처럼 들리겠지만 게임 형식의 디지털치료제를 신경계에 직접 작용시키는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이용장애(게임중독)를 질병으로 규정했는데, 한편에선 게임이 디지털 치료제의 하나로 질병을 고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또 하나의 신약’으로 불리는 디지털 치료제가 3세대 치료제로 관심을 끌고 있다. 디지털 치료제가 온전히 의료 영역으로 들어온 것은 2017년 에프디에이가 미국 피어테라퓨틱스사의 ‘리셋’이란 제품을 승인하면서부터다. 스마트폰 앱 형식인 리셋은 알콜·대마 등 약물중독 환자들이 12주간 동영상 등을 따라하는 프로그램으로 금욕준수율을 상당 수준 향상시켰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같은 해 일본 제약업체 오츠카는 환자가 디지털센서를 넣은 알약을 복용하면, 스마트폰 앱으로 뱃속 약의 효과를 점검하며 조현병 치료를 돕는 ‘아빌리파이 마이사이트'로 에프디에이 판매 허가를 받았다.
디지털 치료제가 치료제 성격을 띠지만, 엄밀히는 의료기기다.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은 지난 3월 펴낸 보고서에서 “디지털 치료제는 법제상 의료기기지만,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기존 의약품과 유사한 질병치료 기능을 제공해 3세대 치료제로 분류하는 추세”라며 “기존 의약품과 마찬가지로 임상, 치료효과 검증, 당국 허가, 의사 처방 등을 거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내 의료기기법(2조)도 기계·장치·재료 등과 함께 의료기능이 있는 소프트웨어를 의료기기의 하나로 본다.
최근엔 가상현실(VR) 장비를 이용한 뇌전증(간질) 발작 측정이나, 물리적 통증 완화 등 개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파킨슨병 같은 뇌신경계 질환이나, 꾸준한 행동습관 변화가 필요한 당뇨·고혈압 등을 치료할 새 대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기존 신약에 견줘 개발기간이 10년 이상 빠르고, 개발비용도 200억원 아래로 바이오의약품 같은 1~2세대 치료제 개발비(평균 3조원)의 1%가 채 안 된다는 평가다. 디지털 치료제의 의학적 효과가 확인되면서 시장규모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미국 시장조사기관 ‘얼라이드 마켓리서치’는 올초 낸 보고서에서 글로벌 시장규모가 2018년 21억2천만달러(2조5천억원)에서 2026년엔 96억4천만달러(11조5천억원)로 성장한다고 내다봤다.
국내 시장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지난해 스타트업인 ‘뉴냅스’가 뇌졸중으로 인한 시야 장애 후유증을 치료하는 가상현실 기반 치료기술 ‘뉴냅비전’으로 국내 첫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디지털치료제 임상 승인을 받았다. 라이프시맨틱스와 에임메드는 각각 만성호흡기질환 재활과 불면증에 쓰일 디지털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송승재 한국디지털헬스산업협회장(라이프시맨틱스 대표이사)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식약처 등이 디지털치료제 규제를 빠르게 정비하고 있지만, 의료기기로 보험급여 적용문제 등 여전히 갈 길이 멀다”며 “한국 정부가 내년에 국제 디지털치료제 정책을 결정하는 국제의료기기규제당국자포럼(IMDRF) 의장국이 되는데, 그에 걸맞게 국내에서도 미래 치료제에 대한 적극적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내손 안 주치의 ‘모바일 앱’
스마트워치로 혈압 등 측정
‘의료용 앱’ 35개나 국내 승인
디지털 의료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앱)이 혈압이나 심전도 측정 등 사실상의 의료기기 구실을 하는 사례들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 6일 판매를 시작한 삼성전자의 스마트 손목시계 ‘갤럭시워치3’에는 혈압측정 기능을 갖춘 ‘모바일 의료용 앱’이 포함됐다. 스마트워치를 손목에 차고 해당 앱의 혈압측정 버튼을 누르면, 마치 시간을 확인하듯 손쉽게 최저·최고 혈압과 심박수까지 확인할 수 있다. 시계 뒤편에서 빛을 내는 엘이디(LED) 혈류측정센서로 손목혈관을 지나는 혈액량을 파악한 뒤, 사전에 설정해둔 평소 혈압(기준혈압) 때의 혈액량과 차이를 비교해 ‘현재 혈압’을 알아내는 방식이다. 한달에 한차례 정도 약국 등에서 팔에 차는 커프형 혈압계로 측정한 혈압을 입력하면 스마트워치가 기준 혈액량을 자동으로 설정한다. 커프형처럼 팔을 옥죄는 통증이 없는 데다, 스마트폰 어플을 통해 매일 혈압수치 측정·관리가 가능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 4월 이 앱에 대해 “기존 전자혈압계 수준의 혈압·맥박 정확도 기준을 충족했다”며 혈압측정용 소프트웨어 의료기기로 세계 첫 사용을 승인했다. 아울러 갤럭시워치3에는 심전도(ECG) 측정 앱도 장착돼 있다. 스마트워치를 착용한 손을 평평한 곳에 올려놓고, 스마트워치 조작버튼에 반대편 손의 손가락 끝을 30초가량 대면 간단히 측정된다.
애초 국내에서는 모바일 치료용 앱이 의료기기로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2월 식약처가 치료용 앱의 플랫폼이 되는 기기·장치에 대한 의료기기 승인이 없더라도, 모바일 앱이 의료기기로서 문제가 없으면 스마트폰 등에서 사용하도록 ‘모바일 의료용 앱 안전관리 지침’을 바꿨다. 공산품인 스마트워치에 의료기기인 치료용 앱을 넣어 손쉽게 활용하는 것이다. 이미 심전도 측정 부품을 탑재해 출시됐던 기존 제품 ‘갤럭시 액티브 워치2’나 애플사의 ‘애플워치4’도 앱을 이용해 해당 기능을 쓸 수 있게 됐다. 4월 말 현재 ‘혈압 앱’을 포함해 국내에서 소프트웨어 의료기기로 승인받은 스마트폰용 앱이 35개나 된다. 식약처는 “앞으로도 최첨단 기술이 접목된 ‘의료기기’가 신속히 제품화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