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부산에서 출발한 에어부산의 ‘도착지 없는 비행’에서 창밖으로 내려다 보인 군산 앞바다.
“안녕하십니까. 부산에서 출발해 부산에 도착하는 ‘구름 위의 국토순례’, 에어부산 8918편입니다.”
어슴푸레한 새벽에 여행용 가방을 돌돌 끌고 설레는 마음으로 공항에 가는 기분, 수속을 밟고 기다린 끝에 배정된 기내 좌석에 앉아 ‘띠링’ 울리는 기내방송에 드디어 떠난다는 들뜸. 그런 느낌은 휴가 때마다 누릴 수 있는 사치라 여겨왔지만, 코로나19는 여행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항공기를 낯선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운송수단만이 아닌, 전체 여행 중 중요한 일부분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여행을 금지당한 코로나19 시대에 기분을 낼 만한 경험을 해볼 수 있게 됐다.
지난 18일 낮 12시30분, 김해국제공항에서 탑승한 항공기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이달 10일 에어부산이 국내 항공사 최초로 내놓은 ‘도착지 없는 비행’(flight to nowhere)의 시작이었다. 이 비행은 지금껏 타본 국내선 중 가장 긴 시간이 걸렸다. 부산에서 출발해 대구, 포항, 서울로 북상한 뒤 방향을 돌려 제주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광주에서 부산으로 되돌아왔다. 1시간51분 여정이었다.
지난 18일 에어부산이 운항한 ‘도착지 없는 비행’의 탑승권에 출발지와 도착지가 모두 ‘부산’으로 적혀있다.
‘유람 비행’이나 ‘경치 비행’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런 이색 비행 상품은 그동안 국외 항공사에서 종종 선보였지만,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여객 수요가 급감하자 최근 들어 본격화하는 추세다. 코로나19가 빚어낸 ‘애잔한’ 유행인 셈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콴타스항공은 지난 17일 시드니에서 출발해 7시간 동안 대륙 전역을 순회한 뒤 되돌아오는 상품이 10분 만에 매진됐다고 발표했다. 콴타스항공 쪽은 “회사 역사상 가장 빨리 매진된 상품이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11일 타이베이에서 출발해 제주 상공을 20분간 선회한 뒤 돌아오는 3시간30분짜리 상품도 4분 만에 모두 팔렸다. 제주도와 타이완 여행사 이지플라이, 항공사 타이거에어가 손잡고 내놓은 이 상품 가격은 6888 타이완달러(약 28만원)였다. 지난 19일 비행에서 승객 120명이 먹은 기내식은 한류 드라마를 통해 인기를 얻은 ‘치맥’(치킨+맥주)이었다. 비행 자체로 여행 기분을 내고 싶어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항공기가 이륙한 지 약 1시간30분이 지난 오후 2시8분께 “지금은 서울 상공입니다. 곧 남쪽으로 선회하겠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구름 아래 깔린 강줄기와 성냥갑 같은 아파트들이 보였다. 이어 2시22분엔 “왼편에는 전주 시내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군산 앞바다를 볼 수 있다”는 방송이 나왔다. 탁 트인 날씨 덕에 창밖을 보니 푸른 바다가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국내선 비행이지만 비교적 ‘장시간’ 여행이기에 기내식으로 샌드위치도 나왔다. 비행하는 느낌이 났다.
이번 비행의 특별함을 더해줬던 건 함께 탑승한 항공운항과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은 기내 실습 목적으로 항공기를 탔다. 에어부산은 처음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내놓을 계획이었으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자 대학 항공운항과 학생들이 기내 실습을 할 수 있는 전세기 형태로 방향을 틀어 운항을 시작했다. 비대면 수업으로 실습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비행기를 예전만큼 띄울 수 없는 항공사도 만족하는 ‘윈윈’이었다.
지난 18일 부산에서 출발한 에어부산의 ‘도착지 없는 비행’에서 부산여대 항공운항과 학생들이 구명복 착용 안내 실습을 하고 있다.
이날은 부산여대 항공운항과 학생 64명이 기내방송부터 구명복 착용 안내, 기내식 배부 등 승무원 실습을 진행했다. 이날 기내방송 실습을 해본 이 학교 2학년 다모소스텔라(22) 학생은 “직접 마이크에 대고 방송을 해보니 승무원이 된 느낌”이라며 “아이돌 연습생이 데뷔 전 무대에 선 것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오랜 만에 친구들을 만나 직접 실습까지 참여한 학생들은 틈틈이 ‘셀카’를 찍으며 들뜬 마음을 드러냈다. 이 학과 조은영 교수도 “비대면 수업으로 학생들이 학교에서 실습도 못 해 위축되는 느낌이었는데 학생들이 직접 기내 실습을 할 수 있게 돼 기쁘다”며 “코로나가 우리에게 준 작은 보상 같다”고 말했다. 제주항공과 아시아나항공도 유사한 상품을 내놓기 위해 채비 중이다.
이날 항공편의 운항을 책임진 전경석 에어부산 기장도 새삼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전 기장은 “일반적인 국내선 경로가 아닌 데다 학생들의 실습 시간에 맞출 수 있도록 시간 관리와 속도 조절에 힘썼다”며 “특히 서울에서 다시 남쪽으로 선회할 때에는 기분이 묘했다”고 말했다. 에어부산은 도착지 없는 여행 상품을 거리두기가 완화되는 대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도 개방한 뒤, 점차 국제선으로도 확대할 예정이다. 약 2시간 안팎의 국내선 상품의 가격대는 기내식을 포함해 15~20만원 수준이 될 가능성이 크다. 타이완이나 일본 등 가까운 국제선 상품을 통해서는 경치 구경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의 영공을 통과하는만큼 기내 면세를 통해 부가 수익을 낼 수도 있지 않겠냐는 구상이다.
부산/글·사진 박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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