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아들은 한국이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을 많든 적든 하고 있고 그것 때문인지 풀죽은 채 살아가는 아이들이 많아요. 하지만 동포들이 조금만 관심을 보여주면 금세 표정이 밝아지고 조국을 자랑스러워 합니다.”
‘미국 한인 입양인의 대부’로 불린 김원보 한미문화협회장이 2003년 ‘한인 입양인 뿌리 찾기’를 위해 사재를 털어 입양인들과 함께 방한했을 때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한미문화협회는 5일 김 회장이 간암으로 1년 동안 투병하다 지난달 10일 별세했다고 전했다.
1934년 평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월남해 동국대를 졸업하고 31살 때인 1965년 미국에 이민했다. 캘리포니아주 벤투라 카운티에 정착해 가발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뒤 호텔업과 부동산업에도 진출했다.
미국 이민 초기 10여년 동안 큰 성공을 거둔 고인은 그 뒤로 삶의 추를 봉사에 두기 시작했다. 벤투라 카운티에 1천 명이 넘는 한인 입양인이 거주한다는 사실을 안 고인은 1983년 한미문화협회를 설립해 최근까지 한국 입양아와 그 양부모들을 초대해 ‘입양인 가족의 날’ 행사를 열었다.
그는 이 행사를 처음 할 때의 심정을 2001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1981년 초 우리 옆집에 살던 백인 부부가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해 왔어요. 이분들이 아이를 어찌나 사랑하고 지성껏 키우는지 존경심이 생길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아이가 어린애 같지 않게 우울해 보이는 거예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늘 혼자 외톨이로 도는 모습을 보면서 떠나온 고향 생각 때문일까, 아니면 저만 외모가 달라 외로움을 느껴서일까 하고 혼자 생각해보곤 했죠.”
많게는 천명까지 모인 ‘입양인 가족의 날’ 행사에서 참석자들은 한식을 나눠 먹고 한국 전통 놀이도 함께 즐겼다. 입양인들은 정체성을 찾아가고 양부모는 한국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고인은 직접 한국을 찾아 입양인들의 친부모를 찾아주는 사업도 했다.
고인은 1984년부터 ‘한국전 참전용사 위안의 밤’ 행사도 열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에 ‘6·25 참전용사협회’가 만들어졌다. 고인은 이런 활동으로 한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과 국민포장을 받았다.
강성만 선임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