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의 석방에 반대하는 시위가 17일 페루 리마에서 열리고 있다. 리마/AFP 연합뉴스
재임 중 살인·고문 등 인권침해와 부패 혐의로 복역 중이던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이 전격 석방된다.
페루 헌법재판소는 17일(현지시각) 후지모리(83)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 무효결정을 취소하고 사면을 허용해달라는 요청을 승인했다고 <데페아>(dpa) 통신이 보도했다. 이에 따라 25년형을 선고받고, 2032년 2월까지 복역해야 했던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곧 석방될 예정이다.
헌재의 이번 결정은 2017년 12월 후지모리 전 대통령에게 내려졌던 사면 결정을 되살린 것이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는 후지모리 전 대통령을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사면했다.
그러나 당시 탄핵 위기에 몰렸던 쿠친스키 대통령이 후지모리 지지 의원들을 만나 로비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이 공개되면서, 대규모 항의시위가 일어나는 등 국민적 반발을 샀다.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사면이 탄핵 모면을 위한 매표용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대법원이 아홉 달 만에 “사면은 무효”라고 판결하면서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재수감됐다.
이번 헌재 결정은 당시 대법원의 사면무효 결정을 취소하고 다시 사면의 효력을 인정한 것이다. 이번 결정은 재판관 4 대 3의 지지로 확정됐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전했다. 그러나 헌재는 이번 결정의 근거나 배경 등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집권 세력을 포함한 좌파 그룹에선 즉각 반발했다.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은 소셜 미디어에 “국제사법기구에서 국민을 위한 정의의 효과적인 이행을 보호해야 한다”고 밝혔다. 아니발 토레스 총리는 법원이 국가에 해로운 결정을 내렸다고 비판했다.
일본계 이민자의 후손인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페루에서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정치인이다. 지지자들은 그가 1990년부터 2000년까지 집권하면서 살인적인 만성 인플레이션을 잡아 경제를 살리고 ‘빛나는 길’ 무장 게릴라 세력을 제압했다고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인권단체에서는 그가 재임기간 권력 유지를 위해 살인을 비롯한 불법체포와 구금, 고문 등 엄청난 인권침해와 각종 부패를 저질렀다고 비판한다.
그는 재임 중 헌법개정으로 대통령의 3선을 막는 장치를 무력화하며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으나, 2000년 11월 그의 측근이 야당의원을 돈으로 매수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이 공개되면서 몰락했다. 리마 등 주요도시에서 사퇴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2005년 11월 정치적 재기를 모색하기 위해 옆나라 칠레로 들어왔으나, 칠레 당국에 의해 체포됐다. 이후 페루로 인도되어 2010년 1월 페루 대법원에 의해 25년형이 확정됐다.
그의 딸 게이코 후지모리는 지난해 페루 대선에 출마하며 “당선되면 부친을 사면하겠다”고 공언했으나, 6월 결선투표에서 카스티요 대통령에 패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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