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8일 라스베이거스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공화당 경선 후보들을 위한 유세를 하고 있다. 라스베이거스/AFP 연합뉴스
결말이 어떻게 나든 누군가는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전직 대통령 거주지 압수수색이라는 초유의 행동에 나서면서 워싱턴 정가는 물론 미국 전체가 손톱을 깨물며 사태의 향방을 주시하고 있다. 수사 대상이 그냥 전직 대통령이 아니라 2024년 대권 재도전을 노리는 인물이자 법치 무시와 선동의 달인인 도널드 트럼프이기 때문이다. 그를 정치에서 퇴출할 수도, 반대로 ‘정치적 탄압’ 프레임으로 그의 대세론을 굳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번 수사는 도박과 비슷한 면을 지니고 있다.
연방수사국이 지난 8일 작심하고 결행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마러라고 사저 압수수색에서 영장을 통해 드러난 잠재적 범죄행위는 세가지다. 방첩법 위반, 사법방해, 정부 자료 불법 취득·파기가 그것이다.
이 중 간첩죄 적용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방첩법 위반 혐의가 가장 치명적일 수 있다. 압수품 목록에는 마러라고에서 1급비밀을 비롯한 11건의 비밀 자료가 발견됐다고 나와 있다. 이 법은 국가 안보 관련 정보의 제3자 유출뿐 아니라 고의적으로 무단 보유하는 행위까지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이 법을 어기면 최장 징역 10년에 처해질 수 있다. <뉴욕 타임스>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변호인이 법무부의 자료 인계 요구를 따랐다고 주장하면서 마러라고에는 비밀 자료가 더 없다고 6월에 확인서를 써줬다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고의성을 따져볼 때 압수수색영장에 적힌 죄목에 따른 기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통상 가장 높은 등급의 비밀로 알려진 1급비밀은 유출되면 “국가 안보에 특히 심각한 손상”을 끼치는 정보다. 마러라고에서는 1급비밀이 4건 압수됐다. 그런데 마러라고에서는 이보다 더 기밀을 요하는 ‘여러 1급비밀/민감 분류’ 정보도 나왔다. 이는 1급비밀 중에서도 매우 민감한 정보원이나 정보 취득 수단과 관련된 정보를 뜻한다. 이런 내용이 유출되면 첩보망 붕괴 등 심각한 피해로 이어진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연방수사국은 마러라고의 비밀 자료 보관 장소에 누가 드나들었는지, 외부로 유출된 정보는 없는지도 조사하고 있다.
비밀 분류 여부를 떠나 정부 기록물의 고의적 은닉, 제거, 파괴도 최장 징역 3년형에까지 처해질 수 있다. 미국 전직 대통령은 백악관을 떠날 때 업무와 관련된 것은 공공 자산으로 간주되기에 메모지 한장까지도 국립문서보관소로 보내야 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앞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 등을 반납한 것도 이것 때문이다. 자료 반납 강제 법률은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증거 은닉을 막기 위해 처음 마련됐고, 1978년 대통령기록물법 제정으로 모든 전직 대통령에게 적용되기 시작했다.
사법방해와 관련해서도 자료를 숨기는 방법으로 연방수사국의 수사를 방해한 점이 인정되면 중형이 부과될 수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마러라고로 옮긴 자료는 자신이 자동적으로 비밀 해제되도록 ‘스탠딩 오더’를 내렸다고 주장하지만, 전문가들은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노련한 형사법 전문 변호사들을 구하려고 애쓴다는 보도가 나오는 것도 그의 위기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500만표 이상 뒤진 대선을 부정선거라고 주장해온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번에도 강력한 부인과 역공으로 위기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2016년 대선 후보 지명 이후로 그는 성폭력 의혹, 성관계 입막음용 돈 지급, 개인 기업 비리, 러시아와의 밀착 의혹, 조 바이든 현 대통령을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우크라이나 정부를 압박한 사건 등으로 특별검사 수사를 비롯해 여러 조사 대상이 됐다. 하지만 두차례 탄핵 시도를 비롯해 어떤 움직임도 ‘불사조’ 트럼프 전 대통령을 추락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해 1월6일 대선 결과 인증을 막으려고 지지자들을 선동해 의사당으로 진격하게 만든 사건은 그의 위헌적 행동을 좌시할 수 없다고 보는 이들에게 중요한 기회가 됐다. 하원 특별조사위원회의 올해 6·7월 공개 청문회에서는 그가 지지자들 일부가 무장한 사실을 알면서도 ‘의사당 진격’을 촉구했다는 증언 등이 쏟아졌다. 이를 전후해 민주당 쪽에서는 수사 착수가 불가피하다는 기대도 있었지만, 법무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연방항소법원 판사 출신인 메릭 갈런드 장관이 좌고우면하는 ‘판사 출신의 한계’를 보인다는 불만이 나왔다.
하지만 이번 압수수색으로 갈런드 장관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이제는 판사가 되기 전 검사로서 적극적이고 치밀했던 모습이 조명된다. 제이미 거렐릭 전 법무부 부장관은 지난해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에서, 1995년 168명이 사망한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 테러 때 자신의 수석보좌관이던 갈런드 장관이 텔레비전으로 사건 현장을 보자마자 “내가 가야겠다”며 수사에 대한 감독을 자청했다고 말했다. 1978년부터 지식인, 기업, 기업가 등에게 사제 폭발물을 소포로 보내 3명의 목숨을 빼앗고 23명을 다치게 한 유너바머 사건도 그의 경력에 굵은 줄로 표시돼 있다. 그는 수사를 이끌면서 1995년 테러범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요구대로 3만5천자짜리 선언문을 싣도록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를 설득했다. 이를 본 카진스키의 동생이 ‘형의 문체인 것 같다’고 제보해 미국을 오랫동안 공포에 떨게 한 미제 사건이 해결됐다.
민주당 전략가 제임스 카빌은 이런 경력을 거론하면서 갈런드 장관은 독사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팟캐스트에서 “이제 1이닝의 정점일 뿐”이라며 꼼꼼한 수사 스타일을 보여온 갈런드 장관의 다음 수를 지켜보자고 했다.
갈런드 장관은 압수수색 직후 트럼프 전 대통령 등이 “기습을 당했다”며 반발하자 11일 기자회견을 열어 “내가 직접 압수수색영장 청구를 승인했다”며 정면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연방수사국이 부당하게 공격받으면 “좌시하지 않겠다”며 직접 총대를 메겠다고 선언했다.
수사가 마무리되면
갈런드 장관과 연방수사국 앞에 크게 두가지 선택지가 놓일 것으로 보인다. 압수수색영장에 명시된 혐의들 중 하나 이상을 적용해 트럼프 전 대통령 쪽을 기소하는 게 첫번째다. 두번째는 반출한 비밀 자료가 국립문서보관소로 이첩된 것을 목적 달성으로 보고 사건을 종결하는 경우다. 2019~2020년 하원 법사위에서 트럼프 당시 대통령 탄핵소추에 법률 자문가로 참여한 노먼 아이즌 등은 <시엔엔>(CNN) 공동 기고에서, 압수품 검토 과정에서 1·6 의사당 난동 등 다른 범죄 혐의에 대한 증거가 발견돼 사건이 가지를 뻗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법률적 검토와 판단보다는 수사 외적 요인들이 사건 처리에 최대 난관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차기 대선 출마 의사가 분명하고 중간선거까지 앞둔 상태에서 지지자들이 ‘정치적 탄압’ 주장에 호응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치행동위원회 쪽은 압수수색 뒤 후원금이 늘었다고 밝혔다. 공화당의 중간선거 경선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지한 후보들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가 지지한 후보들 가운데 상원의원은 8명 중 7명, 하원의원은 21명 중 17명, 주지사 등 주정부 고위직은 22명 중 16명이 승리했다. 반대로 하원 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공화당 내 반트럼프 진영의 선봉장인 리즈 체니 하원의원은 16일 와이오밍주 경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지한 후보에게 대패했다.
미국 언론들은 비밀 유출 수사의 결론은 11월 중간선거 뒤에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잘못이 드러나면 지지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커지는 ‘트럼프의 역설’이 더욱 거센 정치와 사법의 소용돌이 속으로 미국을 끌고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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