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존 에프 케네디, 로버트 케네디, 에드워드 케네디 형제가 메사추세츠주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촬영날짜 미상의 사진. 메사추세츠/AP 연합
에드워드 케네디 타계
에드워드, 형들 뜻 이어받아 진보가치 추구 눈부신 업적
복지·교육·노동자 권익에 온힘…오바마·의보개혁 지지 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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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의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25일 타계한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의 77년 생애는 미국 정치 그 자체였다. 미국 내 진보 성향 정치인들의 ‘대부’ 격이었던 그의 46년 정치역정은 영과 욕이 교차한 것이었다. 케네디 의원은 1932년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아일랜드계 부호 집안의 4남5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버지니아 법대와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1962년 서른 살 나이로 상원의원에 당선했다. 정치 초년 시절 그는 미숙하고 자질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 등 두 형의 그림자가 너무 컸던 탓이다. 젊은 시절 자신의 차에 동승했던 여인이 교통사고로 숨지는 일도 두고두고 구설에 올랐다. 그러나 두 형이 잇따라 암살되면서, 그들이 추구했던 진보적 이상을 이어갈 핵심 인물로 성장했다. <유에스에이 투데이>는 “케네디 의원의 46년 정치인생은 첫인상이 어떻게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판명나는지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1980년 지미 카터와의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뒤 대통령의 꿈은 접었지만, 복지·시민권·건강보건·교육· 노동자 권익 등의 분야에서 보여준 의정활동과 입법 성과는 눈부셨다. <뉴욕 타임스>는 “케네디 의원은 진보적 이슈의 주도적 발언자이자 보수진영의 최대 공격목표였지만, 공화당 안에서 자신의 동조자를 찾아내는 능력은 의원으로서 검증된 보증수표였다”고 평가했다. 2001년 조지 부시 대통령과 협력해 어린이 교육소외 방지법을 통과시켰고, 지난해에는 존 매케인 공화당 의원과 공동으로 이민법 개정을 성사시켰다. 사람들은 그에게 ‘상원의 리버럴한 사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뉴욕타임스>는 “그는 유명인사, 가끔씩 자기 흉내를 내는 사람, 따뜻한 친구이자 정치적 비타협주의자, 신념이 넘치고 흠결도 많은 사람,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애수적 기질을 간직한, 타고난 케네디 집안 사람’이었다”고 전했다.
케네디 의원은 생의 마지막 장을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대통령 후보인 버락 오바마의 당선과 건강보험 개혁에 쏟았다. 지난해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는 “우리가 중대한 실험을 시작하는 내년 1월에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의회 의사당에 있을 것임을 약속한다”는 말로 오바마 당선과 건강보험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케네디 의원은 그 약속을 지켰지만, 건강은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 그는 최근 미국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이 주는 자유의 메달’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정작 자신은 지난 12일 백악관에서 열린 수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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