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안으로워터게이트 사건의 내부 고발자로 밝혀진 전 미국 연방수사국(FBI) 부국장 마크 펠트가 31일 캘리포니아주 샌타로사의 자택 현관에서 딸 조앤과 함께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샌타로사/A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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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펠트 당시 FBI부국장 “누설자” 비난우려 침묵
가족요청에 말문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사임으로 몰고간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딥 스로트(Deep Throat)’ 정체가 30년만에 밝혀졌다. <워싱턴포스트>는 31일 오후(현지 시각) “딥 스로트는 당시 연방수사국(FBI) 부국장이던 마크 펠트(91)”라는 월간지 <배니티 페어>의 보도를 확인하는 장문의 기사를 인터넷에 띄웠다. 1974년 <워싱턴포스트> 밥 우드워드, 칼 번스타인 기자의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에 결정적 도움을 준 ‘딥 스로트’ 정체에 대해, 두 기자와 당시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는 “본인이 죽은 뒤에나 밝힐 것”이라고 말해왔다. ‘딥 스로트’는 우드워드가 자신에게 사건의 비밀을 알려준 제보자를 이렇게 부른 데서 비롯한 말로, 지금은 ‘익명의 제보자’를 통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왜 정보를 제공했을까?=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워터게이트 취재를 다룬 책 <대통령의 사람들>에서 ‘딥 스로트’를 “스카치 위스키를 좋아하고 담배를 피우며 전화통화를 불신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우드워드는 한밤중에 어두운 지하주차장에서만 ‘딥 스로트’ 마크 펠트를 만날 수 있었다. 펠트가 기밀을 제공한 배경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나온다. 우선, 닉슨 행정부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분노다. 펠트는 <배니티 페어>에 글을 기고한 변호사 존 오코너와의 인터뷰에서 “닉슨 행정부는 연방수사국을 정부내 반대파들의 뒷조사를 하는 ‘국내판 중앙정보부’로 활용하려 했다”고 비판했다. 일부에선 백악관과 연방수사국의 긴장관계, 또는 펠트의 개인적 동기를 들기도 한다. 1972년 워터게이트 침입이 일어나기 직전 애드거 후버 연방수사국장이 숨지자 펠트는 자신의 국장 승진을 기대했다. 그러나 닉슨은 외부인사를 그 자리에 앉혔다고 당시 백악관 고문변호사 레너드 가먼트는 말했다. 온라인잡지 <슬레이트매거진>의 팀 노아는 “백악관은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후버의 연방수사국을 제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 배경이 무엇이든 지금 펠트의 행동을 비난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펠트의 손자인 닉은 이날 발표한 가족 성명에서 “우리는 미국을 부정의에서 구하기 위해 개인적 위험을 무릅쓴 할아버지가 위대한 영웅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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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게이트 사건이란 야당에 도청장치…닉슨 결국 사임케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공작반이 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돼 2년 뒤 닉슨의 대통령 사임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을 일컫는다. 처음에는 단순한 ‘주거침입’으로 여겨져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연방수사국(FBI) 및 백악관이 이 도청사건에 연루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녹음 테이프가 드러나면서 사태가 급진전해, 1974년 8월 하원 사법위원회가 대통령 탄핵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닉슨이 스스로 물러났다. 닉슨 개인에 대한 형사 책임 문제가 남아 있었지만,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의 특사로 사건이 일단락됐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사임 결과를 낳았던 이 사태는 미국민의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을 끌어내리는 등 정치적 불신을 낳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반면, 이 사건을 특종 보도했던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은 스타 기자로 떠오르면서 언론의 위상을 한단계 높여줬다. 외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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