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민중사’ 저술…반전·인권운동 앞장
(뉴욕 AP=연합뉴스) 흑인, 인디언 원주민 등 사회적 소수의 시선으로 역사를 기술한 미국의 실천적 지식인 하워드 진 보스턴대 교수가 27일(현지시간) 향년 87세로 타계했다.
하워드 진 교수의 가족은 그가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이날 밝혔다.
역사학자이자 시민운동가였던 그는 1980년 '미국민중사'를 출간함으로써 역사를 기술하는 방법론 자체를 뒤바꿔 놨다.
기존 역사가 정복자, 대통령 등 엘리트 위주로 서술됐다면 진 교수는 흑인, 인디언 원주민 등 소외된 사람들의 시선에서 역사를 봤다. 역사는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든다'는 관점이었다.
1980년 당시 미국민중사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출판됐으며 초판은 5천부를 찍는데 그쳤다. 그러나 입소문이 퍼져 2003년엔 100만부를 돌파했으며 결국 고교와 대학 교재로 자리를 잡게 됐다.
실천적 지식인 노엄 촘스키 교수는 "그의 책은 수백만명이 역사를 보는 방식을 바꿔놓았다"며 "그만큼 강력하고 유익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없다"고 평가했다.
미국민중사는 '자유주의'라는 단어조차 사용하기를 꺼리던 엄혹한 시절에 공개적으로 좌파적인 역사를 표방했다.
그는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대해 학살이라는 죄과를 거론했다. 미국을 경영한 역대 대통령보다 노동자.페미니스트.반전론자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췄다.
진 교수는 1998년 인터뷰에서 당초부터 객관적이고 완벽한 역사책을 쓸 목적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민중사는 전통적인 역사책에 대한 반작용이며 이런 작업은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미국민중사가 삶의 방식을 바꿔놓은 사람 중에는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과 같은 영화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영화 '굿윌헌팅'의 각본을 쓰면서 미국민중사를 이해하지 않으면 미국을 이해할 수 없다는 대사를 넣었다. 거장 올리버 스톤 감독도 그를 신봉했으며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도 그의 영향을 받아 앨범을 내놨다. 1922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유대인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즐겼다. 유년기의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시위에도 종종 나섰다. 나치에 대한 증오 때문에 공군에 입대해 유럽 전역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해 훈장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 후회했다. 뉴욕대와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이후 흑인들만 다니는 스펠만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흑인 학생들에게 인권 운동을 고무시켰으며 당시 정부가 흑인 인권을 보호하는데 너무 느리다며 비판하기로 했다. 이 같은 반골 기질 때문에 그는 1963년 해직됐으며 이후에 보스턴 대학으로 건너가 베트남 반전 운동을 전개했다. 1988년 은퇴한 후에도 인권운동을 위해 거리에 피켓을 들고 나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진은 멋쟁이였다. 훤칠한 키에 매력적인 고수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대중 연설에 능했다. 겸손하고 친화력이 있었으며 대결보다 설득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자전적 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외에 3편의 희곡을 쓰기도 했다. 부인 로슬린은 2008년 먼저 작고했으며 슬하에 2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영화인 애플렉은 "진은 민주주의와 미국에 대해 '반대'라는 가치가 얼마나 귀중하고 필요한 가치인지를 가르쳐 줬다"며 "그 덕분에 엘리트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역사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speed@yna.co.kr
진 교수는 1998년 인터뷰에서 당초부터 객관적이고 완벽한 역사책을 쓸 목적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민중사는 전통적인 역사책에 대한 반작용이며 이런 작업은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미국민중사가 삶의 방식을 바꿔놓은 사람 중에는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과 같은 영화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영화 '굿윌헌팅'의 각본을 쓰면서 미국민중사를 이해하지 않으면 미국을 이해할 수 없다는 대사를 넣었다. 거장 올리버 스톤 감독도 그를 신봉했으며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도 그의 영향을 받아 앨범을 내놨다. 1922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유대인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즐겼다. 유년기의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시위에도 종종 나섰다. 나치에 대한 증오 때문에 공군에 입대해 유럽 전역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해 훈장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 후회했다. 뉴욕대와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이후 흑인들만 다니는 스펠만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흑인 학생들에게 인권 운동을 고무시켰으며 당시 정부가 흑인 인권을 보호하는데 너무 느리다며 비판하기로 했다. 이 같은 반골 기질 때문에 그는 1963년 해직됐으며 이후에 보스턴 대학으로 건너가 베트남 반전 운동을 전개했다. 1988년 은퇴한 후에도 인권운동을 위해 거리에 피켓을 들고 나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진은 멋쟁이였다. 훤칠한 키에 매력적인 고수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대중 연설에 능했다. 겸손하고 친화력이 있었으며 대결보다 설득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자전적 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외에 3편의 희곡을 쓰기도 했다. 부인 로슬린은 2008년 먼저 작고했으며 슬하에 2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영화인 애플렉은 "진은 민주주의와 미국에 대해 '반대'라는 가치가 얼마나 귀중하고 필요한 가치인지를 가르쳐 줬다"며 "그 덕분에 엘리트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역사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spee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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