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하얀 명분’ 뒤에 ‘검은 실리’ 지난달 18일 조지 부시 대통령은 뜻깊은 상을 받았다. 전세계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보수 싱크탱크인 국제공화연구소(IRI)의 ‘올해의 자유상’이다. 부시는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18개월간 우리는 전세계에서 장미(그루지야), 오렌지(우크라이나), 퍼플(이라크), 튤립(키르기스스탄) 그리고 백향목(레바논)으로 상징되는 혁명을 지켜봤다. 테러리즘 격퇴를 위한 최선의 방안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산하는 것이다.” 며칠 뒤엔 영국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국제전략연구소(IISS)가 “1년 전에 비해 중동 상황이 좋아졌다. 부시 행정부 정책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 1월 2기 취임사에서 전세계 민주주의 확산이란 야심찬 ‘부시 독트린’을 밝힌 이후,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상황 전개가 부시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미국 내에서 부시의 정책 목표를 문제삼는 목소리는 그리 많지 않다. 사사건건 부시 정책에 날을 세우는 민주당도 민주확산론엔 입을 다물고 있다. 부시 외교정책에 비판적인 외교협회(CFR)의 제임스 린지 부회장은 “민주확산론의 방향은 옳다. 다만 이걸 관철할 전략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보편적 인식의 밑바닥엔 2001년 9·11 테러가 놓여 있다. 과거 미국은 지역안정론을 내세우며 권위주의 정권들을 지지했다. 이것이 장기적으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고, 9·11과 같은 테러로 표출됐다는 인식에 진보·보수 진영이 공감하고 있다. 이 점에서 ‘테러리즘과 맞서싸울 유일한 무기는 민주주의 확산’이란 부시 주장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권 전략적 가치 따라 이중 태도
대의 옳지만 동기 순수성 안 믿어
“힘으로라도…” 지나친 개입 충돌
그러나 올바른 목표가 성공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민주확산론에서 더 중요한 건 수단과 과정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말한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중동전문가 머리나 오터웨이는 “부시의 민주확산 정책이 갖는 위험성은 목표의 잘못보다는 그 동기의 순수함이 중동이나 다른 이슬람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부시 행정부는 ‘민주 확산’이란 대의와 ‘눈앞의 전략적 이익’의 충돌 속에서 매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략적 가치’가 적은 나라에 대한 민주화 압력은 매우 거세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지난 4월 벨로루시를 방문했을 때, 라이스는 반체제인사들을 직접 만나 정치개혁 방안을 협의했다. 그러나 전략적 중요성이 큰 동맹국으로 가면, 부시 행정부의 태도는 모호해진다. 지난 1일 부시 대통령은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오는 9월의) 대선을 민주적이고 공정하게 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며칠 전 그의 부인 로라는 이집트를 방문해, “완전한 민주주의란 쉽지 않다”고 무바라크를 옹호했다. 에드워드 워커 중동연구소장은 <로스앤젤레스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건 장난과 같다”고 비판했다. 지난달 말, 미국의 새뮤얼 보드먼 에너지장관은 아제르바이잔을 방문했다. 미국의 영향권 안에서 유럽으로 석유를 실어나를 새 송유관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축하연설에서 ‘민주주의’를 언급했지만, 바로 며칠 전 현지경찰이 반정부 시위를 혹독하게 탄압한 사실엔 눈을 감았다. 새 송유관이 미국의 석유 수입다변화 전략에 매우 긴요했기 때문이다. 부시의 정책에서 드러나는 또하나의 문제점은 미국의 지나친 개입이다. 리처드 펄 전 국방정책위원장은 현 정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중 한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지난달 26일 ‘테러리즘과 민주화’란 제목의 강연에서 “우리는 힘으로 민주주의를 이식할 수 없다. 그러나 때론 민주화의 걸림돌을 힘으로 제거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이라크 침공과 그 이후의 정치일정 개입은 이런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미국은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민주화 과정에서, 차기 권력이 미국과 이념적으로 가까운 정치적 자유주의자 그룹에 넘어가길 바란다. 하지만 현실은 미국 기대와는 다르다. 소련 전문가인 폴 고블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중앙아시아의 상당수 나라에서) 권위주의 정권들을 제거하고 나면 그 뒤엔 이슬람 정권이 들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중동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걸 피하기 위해 미국은 ‘개입’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의 지나친 이라크 개입은 중동 전체에 매우 큰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머리나 오터웨이 카네기재단 연구원은 “미국은 지금이라도 이슬람 강경세력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임스 린지 외교협회 부회장은 “가령 레바논에서 헤즈볼라가 정권에 참여하더라도 그걸 두려워해선 안된다. 권력은 책임을 수반하는 법이다. 단기적 마찰은 불가피하겠지만, 우리는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미 외교정책 시험대 중앙아시아 ‘민주’ 이식하고 ‘석유’ 차지할까
미국 외교정책이 에너지 확보, 테러와의 전쟁,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까?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이에 대한 시험대가 되고 있다. 옛 소련이 무너진 뒤 정권교체 없는 1인통치 또는 세습통치가 계속돼온데다 풍부한 석유와 자원이 있고, 확산되는 이슬람주의까지 모든 것을 갖춘 무대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중국과 미국의 영향력이 부딪치고 있는 상태여서 최근 이 지역에서는 정치적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키르기스스탄에서 반정부세력의 시위로 15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있던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이 물러나는 ‘튤립혁명’이 일어났으며, 미국은 여기서 일부 ‘민주세력’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지난 5월 우즈베키스탄의 반정부 시위대 유혈진압을 둘러싸고는 특수부대를 훈련시킨 미군에 대한 책임론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이제 초점은 카스피해 국가들 중 최대 원유 매장량을 갖고 있는 아제르바이잔과 카자흐스탄이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오는 11월, 카자흐에서는 내년에 대선이 예정돼 있다. 두 나라 정부는 최근 주변국의 상황이 번져올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난달 개통된 미국 주도 비티시(BTC) 송유관의 핵심국인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지난 2003년 아버지로부터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은 일함 알리예프 정권에 도전하는 야당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바쿠의 유전지대에서 터키 제이한으로 원유를 수송하는 비티시 송유관에 대규모 투자를 해온 미국은 알리예프 정권과 긴밀한 사이다. 대를 이은 독재권력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 사이에서 미국의 향후 대응이 주목된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91년부터 통치해온 카자흐스탄 역시 야당 세력의 활동을 사실상 금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대통령의 딸인 다리가의 대통령직 세습 움직임도 있다. 미 석유기업 셰브론텍사코 등은 카스피해 텡기즈 유전에 큰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카자흐군 역시 미군과 합동군사 훈련을 하는 등 관계가 긴밀하다. 미국은 명분과 실리 사이의 어느 지점에 ‘지팡이’를 꽂을까?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 카네기재단 오터웨이 연구원 “중동민주화 방향은 맞지만 너무 서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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