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독립 200년- 새로운 리더십을 찾아서
① 브라질 ‘룰라’에게 배우라
독재·부패 역사 청산하고, 분배-성장 두토끼 다 잡아…야 대선후보도 후계 자처
① 브라질 ‘룰라’에게 배우라
독재·부패 역사 청산하고, 분배-성장 두토끼 다 잡아…야 대선후보도 후계 자처
“역사적 인물 룰라와 세하, 경험 있는 두 지도자.”
대선을 한달여 앞둔 브라질의 텔레비전 정치광고 내레이션이다. 이 광고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야당인 사회민주당의 조제 세하 대통령 후보다. 야당 후보의 선거 캠페인에 집권 여당 대통령이 버젓이 등장한 것이다. 세하 후보는 아예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에 대한 공격을 단념하고 그와 다정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는 이번 선거 포스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 역시 룰라다. 룰라 대통령은 과거 다섯 차례 대선에 나왔지만 이번엔 3선 금지에 묶여 출마하지 않는다.
다음달 3일로 예정된 대선을 한달 앞둔 이달 초 브라질 양대 도시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에선 선거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후보들 면면과 공약에 대한 관심은 뒷전이고, 퇴임 4개월여를 남긴 현직 대통령의 인기가 선거 분위기를 지배하는 보기 드문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8년 임기를 마치고 퇴장하는 대통령의 지지율 80%가 만들어낸 상황이다.
야당 후보조차 현 대통령의 정책 승계를 내세우는 것만큼 룰라의 성공을 대변하는 풍경도 없다. 세하 후보는 “내가 룰라의 정책을 지속시킬 적임자”라며 지지율 끌어올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의 지지율은 여당인 노동자당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후보의 절반께까지 떨어졌다. 너나없는 룰라 끌어들이기에 일간 <이스타두 지 상파울루>가 보다 못해 “여당 후보가 있는데 그러는 것은 서커스 수준의 쇼”라고 비난할 정도다. 일부 여당 총선 후보들은 자신보다 룰라 대통령의 얼굴을 더 크게 부각시킨 포스터를 내걸고 있다.
룰라 대통령의 눈부신 성공은 브라질이라는 한 국가를 넘어 지도자들의 독재와 부패, 망명 등 부정적 유산으로 얼룩진 남미 정치사를 새로 썼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그의 인기를 ‘신성불가침’ 수준으로 만든 요인은 견실한 경제 성장과 빈곤 해소, 그리고 국가 위상 높이기 등으로 요약된다. 1994, 98년 대선에서 룰라 대통령을 거푸 꺾은 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 전 대통령조차 “룰라가 다시 나선다면 아무도 그를 패배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세계 8위로 부상한 브라질의 국내총생산(GDP)은 올해 7% 넘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룰라 대통령 집권기인 2003~2008년 빈곤층은 43% 줄었고, 인구 1억9000여만명 중 빈곤층에 속하던 3200만명이 ‘신중산층’에 합류했다. 집권 첫해 12.3%였던 실업률은 6%대로 내려왔다.
수치뿐 아니라 경제의 탄력과 건전성도 크게 개선됐다. 브라질도 지난해 경기 침체(-0.18% 성장)를 겪었지만 주요국들 중 가장 먼저 침체의 그늘을 벗어났다.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지면 브라질은 “가장 늦게 빠져들고, 가장 빨리 빠져나올 것”이라는 룰라 대통령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주변국들과 함께 채무국의 대명사이던 브라질은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에 자금을 대는 채권국으로 탈바꿈했다. 남미 경제를 망치는 역병과도 같던 인플레이션 공포에서 해방된 것도 룰라 대통령이 점수를 딴 대목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 확보를 추진하고, 이란 핵문제 중재에 적극 나서는 등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과 대등한 반열에 서려는 국제정치 무대에서의 행보 역시 브라질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마리아 에르미니아 타바리스 지아우메이다 상파울루대 국제관계연구소장은 “집권 노동자당이 대선에서 이기면 그것은 룰라의 개인적 승리와 다를 바 없다”며 “그는 서민들의 삶을 확실히 개선하는 정치를 필요로 하는 세계적 흐름을 탄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상파울루 리우데자네이루/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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