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박해 피하려 도망…‘팔’ 가해자로 신분 바뀌어
1914년 독일 베를린의 인구 중 유대인은 5%였으나, 전체 세금의 3분의 1을 냈다. 인문계고 김나지움 진학자 4명 중 1명이 유대인이었다. 1908년 프러시아 최고 갑부 29가족 중 9가족이 유대인이었고, 부호 5명 중 1명이 유대인이었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 전야 독일에서 유대인의 풍경이다. 현재 미국에서 유대인은 2.2%에 지나지 않으나, 하버드대 학부생의 30%를 차지한다. 이는 유대인이 미국 사회 핵심 분야에서 차지하는 몫이나 마찬가지다. 과거 유럽과 현재 미국에서 위치가 점점 닮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로마 멸망 뒤 서유럽 암흑시대 때 유대인들이 무역과 상업, 금융을 유지했다. 본격적인 중세시대 때에는 유대인들에게 농지를 주지 않아, 천시받던 고리대금업 등에나 종사해야만 했다. 이는 유대인들이 금융과 학술 등을 점령하게 된 배경이 됐다. 또 유대인에게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나오는 고리대금업자처럼 ‘돈만 아는 수전노’와 함께 ‘근대의 진보적 사상과 운동의 주인공’이라는 양면을 안겨줬다. 노벨상 수상자의 35% 정도가 유대인이라는 것에서 잘 증명된다. 특히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절반 이상이 유대인이다. 나치 등 우파들은 유대인들이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주도자들이라면서 박해했고, 일부 진보진영과 다수 민중들도 유대인을 국제투기자본의 음모가로 여겼다.
미국 유대계의 주류는 ‘아슈케나지’이다. 중·동부 유럽계 유대인인 아슈케나지는 지중해계 유대인 ‘세파르디’와 함께 유대인 최대 집단이다. 스페인에 거주하던 세파르디도 15세기 기독교 세력의 스페인 정복 뒤 24만명이나 추방당해, 비교적 유대인에게 관대하던 폴란드 등지로 이주했다. 앞서 서유럽에서도 십자군 시절 유대인들은 학살과 추방을 당했다. 아슈케나지들도 18세기 이후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벌어진 ‘포그램’이란 유대인 박해에 밀려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으로 물밀듯이 이주해, 오늘날 미국 유대계 사회의 근간이 됐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유대인 10만명이 참전해 3명 중 1명이 훈장을 받고 1만2000명이 전사했다. 그들은 독일을 자신의 조국이라고 굳게 믿었으나, 돌아온 것은 600만명이 넘게 숨지는 홀로코스트였다. 이 홀로코스트는 현대 유대인 정체성의 근원이 됐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는 방어벽이 됐다. 이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이 건국됐고, 미국 내 유대인들도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게 사회적 지위를 넓혔다.
유대인은 과거에는 일방적으로 박해받는 쪽이었으나, 이제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가해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그들이 최근 제기되는 비판을 과거의 박해 경험으로 동일시할지 아니면 문제를 푸는 비판으로 수용할지는 아직 진행형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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