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반정부 인사 16명이 지난해 9월 쿠바 수도 아바나의 한 장소에 모여 정치범 석방과 정치적 억압 중단, 유엔인권규약 비준, 쿠바 시민사회 인정 등 4개항을 정부에 요구하기로 합의했다. 요아니 산체스의 블로그 ‘제너레이션 Y’. 아바나/박현 특파원
[쿠바 개혁·개방 현장을 가다] (2) 점진적 정치개혁
쿠바 정부가 개혁을 진행중이라고 하지만, 쿠바에선 여전히 일반 시민들에 대한 국가기관의 감시체제가 촘촘히 작동하고 있는 듯했다. 아바나에서 만난 시민들은 옆에 다른 시민이 있으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것을 꺼렸다. 자칫 체제 반대자로 낙인 찍힐 것을 두려워 하는 듯했다. 그래서 인터뷰를 할 때는 한사람씩 따로따로 해야 했다. 익명을 요청한 50대의 한 국영기업 간부는 “쿠바 사람들은 두 사람이 있으면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경찰에 신고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쿠바 경찰은 구역별로 주민감시체제를 유지하고, 밀고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는다. 언론은 국영방송과 공산당 기관지만이 존재한다. 지난해 12월17일 미국과 쿠바간 국교정상화 선언 때 쿠바 정부가 정치범 53명을 석방한다는 조항이 있었으나 쿠바 시민 상당수는 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언론이 이런 내용을 다루지 않은 탓이다.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 주도하는 개혁은 주로 경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국가의 직접 통제를 줄이는 대신 시장의 영역을 확대하려는 것이 그 뼈대다. 그러나 일부 자산의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고 이윤 추구를 장려하는 이런 조처들은 정치적 함의 또한 내포하고 있다.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자율성이 커지고 시민사회 단체들의 활동 공간도 넓어질 수밖에 없다. 또 미국·유럽연합 등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인권 개선이라는 요구조건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흐름 속에서 쿠바에서도 정치적 자유가 점차 확대되고, 시민사회의 공간도 넓어지고 있다.
정치적 자유 부문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정치범 석방이다. 국제 인권단체들의 통계를 보면, 쿠바 내엔 1990년대 말에 200~300명의 정치범이 투옥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민주선거와 언론·집회 자유, 정치범 석방 등의 허용을 요구하는 청원서에 1만1000명이 서명한 사건을 빌미로 2003년 75명이 체포됐다. 이른바 ‘검은 봄’ 사건이다. 쿠바 정부는 2011년 유럽연합과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검은 봄’ 사건 투옥자와 90년대 투옥자 등 모두 166명의 정치범을 석방했다. 여기에다 최근 미국과 관계개선을 추진하면서 미국이 정치범으로 규정한 53명을 올 1월 초 추가 석방했다. 이에 따라 장기 구금 중이던 정치범들은 대부분 석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 감시체제 아직 촘촘
정치범들은 대거 석방
장기 구금도 줄어들어 가톨릭이 ‘정치 변화’ 주요 역할
최근엔 블로그 통한
사회비판 활발해져 “10년새 인권상황 많이 개선돼”
시민사회 부문에선 종교단체, 특히 가톨릭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가톨릭은 정치범 석방을 중재하는 등 국가와 시민사회의 중간다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쿠바는 혁명 기간에 종교 활동을 사실상 금지했다가 1992년부터 허용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1998년 쿠바 방문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당시 피델 카스트로가 공항에 나가 영접했고, 혁명광장에서 열린 미사엔 100만명이 참석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12년 방문했을 때는 라울 카스트로가 2900명의 죄수를 사면하고 사형제를 폐지했다. 특히, 하이메 오르테가 쿠바 추기경은 2011년 정치범 석방을 정부와 시민사회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지난 21일 찾아간 아바나의 미라마르 성당에선 30여명이 미사를 올리고 있었다. 이 성당 소속 신학교 학생인 레안드로(21)는 폴란드에서 온 관광객들의 요청으로 진행되는 미사라고 했다. 그는 “이 성당은 1952년 설립돼 1962년까지 문을 열었으나 혁명 기간 중에는 정부가 성직자들을 농장으로 보냈고 신자들은 비밀리에 미사를 드려야 했다”며 “1998년 다시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인구 250만명이 사는 아바나엔 이런 성당이 20여개 있다고 했다.
블로거들이 자생적으로 활발한 사회비판 운동을 하고 있다는 점도 새로운 현상이다. 쿠바에선 당국의 허가를 얻은 약 10%의 사람들만이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외국합작사의 인터넷 접속 아이디를 불법으로 이용하거나 호텔 인터넷 카페 등에서 제한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개혁적 학자나 기자, 예술가, 반체제 인사 등이 블로그를 통해 쿠바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시민기자를 자처하는 요하니 산체스가 운영하는 블로그 ‘제너레이션 Y’는 국제적 명성을 얻을 만큼 유명하다. 산체스는 최근 블로그에서 “미-쿠바간 합의를 환영한다. 그러나 쿠바 정부의 민주화 일정표는 빠져 있다”며 “정치적 탄압 중단, 유엔 사회권 규약 비준, 쿠바 시민사회 인정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블로그는 쿠바 내에선 접속이 차단돼 있어 일반 시민들은 그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쿠바 전문가인 윌리엄 레오그란데 아메리칸대 교수(정치학)는 “쿠바 내 인권 상황이 10년 사이에 많이 바뀌었다”며 “10년 전에는 반체제 인사들이 투옥되면 5~20년간 장기간 감옥살이를 했으나 지금은 집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체포했다가 하루 이틀 뒤에 풀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쿠바 당국은 체제 내 비판에 대해서는 좀더 관용적이 됐지만,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탄압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바나/박현 특파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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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범들은 대거 석방
장기 구금도 줄어들어 가톨릭이 ‘정치 변화’ 주요 역할
최근엔 블로그 통한
사회비판 활발해져 “10년새 인권상황 많이 개선돼”
쿠바 수도 아바나에 있는 미라마르 성당에서 신학교 학생인 레안드로(왼쪽)가 1962~1997년 종교가 금지됐을 때 성당 문을 활짝 열지 못하고 비밀리에 미사를 지냈다고 설명했다. 옆에 있던 몸이 불편한 신자 쿨리안(59)이 성당에서 옷과 신발 등을 선물로 받았다며 활짝 웃고 있다. 아바나/박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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