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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국·중남미

모두가 만족하는 ‘도시의 재탄생’

등록 2015-12-31 22:24수정 2016-01-01 09:48

존 타시로 시티마켓 총매니저가 12월14일(현지시각) 농산물·과일 코너에서 버몬트 지역에서 재배한 비싼 유기농 토마토와 다른 지역의 다소 싼 토마토 가격을 비교하면서 저소득층도 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상품을 가격별로 균형있게 배합해 놓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존 타시로 시티마켓 총매니저가 12월14일(현지시각) 농산물·과일 코너에서 버몬트 지역에서 재배한 비싼 유기농 토마토와 다른 지역의 다소 싼 토마토 가격을 비교하면서 저소득층도 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상품을 가격별로 균형있게 배합해 놓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더불어 행복한 세상] ‘포용적 성장’ 미 벌링턴 가다
2010년 경제·금융 전문지 <키플링어>는 캐나다와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미국 북부의 버몬트주 벌링턴을 워싱턴, 뉴욕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10대 도시 중 하나로 꼽았다. 미국연금협회는 2007년 은퇴자들이 주목할 만한 4개 도시 중의 하나로 벌링턴을 선정했다.

미국 벌링턴시 위치
미국 벌링턴시 위치
벌링턴은 버몬트주에선 가장 큰 도시지만 미국 전체적으로 보면 인구 4만명이 조금 넘는 작은 도시일 뿐이다. 그럼에도 벌링턴은 성공적인 ‘도시 개발 모델’로 미국 안에서 별난 위치를 인정받고 있다. 여름엔 캠핑, 가을엔 단풍, 겨울엔 스키를 즐길 수 있는 천혜의 자연풍광 때문만은 아니다. 수십년 동안 중산층과 노동자 보호, 재생에너지 사용 등 지속가능한 경제를 도모하는 ‘포용적 성장’이 단단한 결과물로 쌓였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모습이 미국인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는 셈이다.

생활협동조합이 운영하는 벌링턴 번화가의 슈퍼마켓인 시티마켓은 ‘벌링턴 모델’의 상징 같은 곳이다. 12월14일(현지시각) 방문한 시티마켓은 평일 오후 4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도 손님들로 붐볐다. 직원들의 표정이나 대화에서 유쾌함이 묻어난다. 계산을 기다리는 손님들의 얼굴에도 짜증내는 기색이 없다. 시티마켓의 연매출은 4300만달러(약 503억원)로, 미국내 3천개의 협동조합 중에서도 단일 매장 기준으로 가장 높다. 직원 수만 해도 230명에 이른다. 조합원은 1만명에 이르고, 상품 공급자도 270곳에 달한다. 외형상으로도 웬만한 대형 슈퍼마켓이 부럽지 않다.

시티마켓의 출발은 미미했다. 1970년대 초 생활운동의 하나로 진보적 인사들 몇십명이 벌링턴 교외에 사무실을 두고 유기농과 지역농산물을 집단구매해 나눠 소비하는 형태였다. 2002년 시티마켓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는다. 대형 슈퍼마켓 체인점인 쇼스(Shaw’s)가 현재 시티마켓 자리에 입점하려 하자, 시의회가 제동을 걸었다. 대형 슈퍼마켓 체인점이 들어서봤자, 이익의 상당 부분이 외부로 빠져나가 벌링턴 경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형마트 발 못붙이게 막아
생협 마켓이 지역경제 ‘산소통’
직원만 230명…연매출 503억원

임대주택 비율 의무화
샌더스 의원 1980년대 시장 시절
호수 근처 호화빌딩 재개발 제동
공공 영구임대주택으로 바꿔

‘100% 재생에너지’ 신화
풍력·태양열 등 100% 전기 생산
2009년부터 요금 한번도 안올려

시의회는 시티마켓에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다만, 조건을 달았다. 비싼 유기농과 지역농산물만 팔지 말고, 저소득층을 위해 값싼 상품도 함께 팔라는 거였다. 회원제를 유지하되, 일반인도 물건을 살 수 있게끔 문호를 개방하도록 했다.

유기농이라는 조직 원칙과 ‘계급적 배려’라는 의회의 요구 사이에서 조합 내부에서 격렬한 ‘노선 투쟁’이 일었다. 하지만 조합은 시의회의 결정을 수용하기로 했다. 존 타시로 총매니저는 “지금은 70%는 유기농·지역농산물을 팔고, 나머지 30%는 싼 농산물을 팔고 있다”며 “높은 가격, 중간 가격, 낮은 가격 등을 적절히 배합해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고 말했다. 실제, 총매니저의 안내로 토마토 판매 코너를 가보니, 조금 싼 가격의 멕시코산 유기농 토마토와 다소 비싼 가격의 버몬트주산 토마토 등을 함께 팔고 있었다.

시티마켓은 미국 안에서도 보기 드물게 직원들에게 높은 수준의 급여와 복지를 보장하고 있다. 법정 최저임금이 아니라 실질적 생활이 가능하도록 ‘생활임금제’를 채택하고 있고, 실적에 따라 보너스가 추가된다. 1년에 4주간의 유급 휴가가 주어진다. 모든 직원들에게 무료 버스 이용권을 주고, 근무 중 커피와 차는 무제한 거저 제공되며, 할인가로 물건을 살 수 있게 했다. 생산자들한테는 이자를 받지 않고 자금을 빌려주는 ‘제로 퍼센트 론’ 정책을 펴고 있다. 생산자들이 성장해야 시티마켓도 성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형 슈퍼마켓을 거부한 벌링턴의 자부심은 시내 가장 번화가인 처치 스트리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메이시스 백화점을 제외하고는 작지만 특색있는 음식점들, 보석 수공예점, 옷가게 등이 들어서 있다. 월마트, 타깃 등 미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대형할인점은 없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1980년대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소규모 개인 사업자들에게 시 정부 자금을 대주며 육성한 덕분이라고 한다.

벌링턴 모델의 또 다른 축은 ‘혼합형 용도지역제’(inclusionary zoning)로 불리는 일종의 임대주택 정책을 꼽을 수 있다. 일반 사업자가 주택개발을 할 경우에 10~25% 정도의 비율을 의무적으로 저소득층한테 임대하도록 한 것이다. 임대료는 세입자의 소득 수준에 따라 사실상 시 정부에서 결정한다.

미국 벌링턴 시민들이 12월13일(현지시각) 저녁 섐플레인 호숫가의 ‘워터프런트 파크’를 산책하고 있다. 이 부지를 소유하고 있던
한 벌링턴 갑부가 1980년대 초호화 호텔 등을 지으려 했으나 당시 시장이었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이를 무산시키고 시민들의 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미국 벌링턴 시민들이 12월13일(현지시각) 저녁 섐플레인 호숫가의 ‘워터프런트 파크’를 산책하고 있다. 이 부지를 소유하고 있던 한 벌링턴 갑부가 1980년대 초호화 호텔 등을 지으려 했으나 당시 시장이었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이를 무산시키고 시민들의 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임대주택의 뿌리는 샌더스 상원의원이 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노스게이트 아파트 투쟁’으로 불리던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섐플레인 호수 근처의 노른자 지역에 위치한 아파트 부지 소유자들이 기존 세입자들을 내쫓고 재개발을 하려 하자, ‘샌더스 시장’은 세입자들을 조직해 맞서 싸웠다. 노스게이트 아파트 운영이사회의 이사를 맡고 있는 테드 윔피(63)는 “땅 주인들은 기존 임대아파트를 밀어내고 큰 빌딩과 호화 콘도를 짓고 싶어했지만 샌더스는 노동자들이 경치가 좋은 곳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주정부와 연방정부, 은행 등으로부터 기금을 지원받아 공공 영구임대주택으로 바꿨다”고 소개했다.

지속가능한 ‘친환경’은 벌링턴의 또 다른 얼굴이다. 벌링턴전력회사는 올해 초 나무칩·풍력·수력·태양열 등의 재생에너지로만 100% 전기를 생산하게 됐다고 발표했다. 2009년부터 전기료를 한번도 올리지 않아 가계 부담도 줄여주고 있다. 닐 런더빌 총지배인은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면 평균적으로 좀 더 저렴하고 안정적인 가격으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벌링턴이 어떻게 미국 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발전 모델을 꾸려올 수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자유분방한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부터, 1960년대 뉴욕 등에서 인권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벌링턴으로 이주해 지역운동을 한 덕분이라는 분석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981년 시장으로 당선된 샌더스가 네 차례 연임을 하면서 토대를 다지고, ‘샌더스 후계자들’이 계승 발전시킨 정책적 성과들을 유권자들이 인정해줬다는 것이다. 지난 34년간 단 한차례만 공화당 시장이 집권했을 뿐이다. 제인 노델(61) 버몬트주립대 경제학 교수 겸 시의회 의장의 말대로 “평등의 문제는 경제뿐 아니라 정치의 영역”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벌링턴/이용인 특파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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