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의 한 여성(32)이 지난해 8월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아들 사진을 내보이고 있다. 이 여성은 2008년 브라질에서 온 유엔 평화유지군 대원에게 성폭행당해 이 아이를 낳았다. 포르토프랭스/AP 연합뉴스
먼 나라에서 온 아저씨는 가난과 싸우고 있는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 아이들에게 과자를 줬다. 가끔은 몇 달러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컸다. 스리랑카에서 온 유엔 평화유지군 대원들은 12살 안팎의 소녀, 소년들과 성관계를 원했다. ‘1번 피해자’(Victim No. 1)라고 알려진 한 소녀는 유엔 조사관한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시 가슴도 없었어요.” 소녀는 12살 적부터 3년 동안 50명 가까운 평화유지군을 상대했다고 했다. 어떤 군인은 대가로 75센트를 줬다.
유엔 평화유지군이 어린이를 상대로 한 성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나 거의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고 <에이피>(AP) 통신이 12일 보도했다. <에이피>는 “유엔 평화유지군과 다른 직원들이 2004~2016년 2000건에 가까운 성폭행과 성착취 등 성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사태가 더욱 심각함을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또 “이들 가운데 300건 이상이 어린이를 상대로 한 것이지만, 처벌받은 사례는 소수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특히 <에이피>가 확보해 공개한, 아이티의 사례를 조사한 유엔 내부 보고서는 생생하면서도 참혹한 증언을 담고 있다. ‘1번 피해자’ 외에도 ‘2번 피해자’(16)는 스리랑카 지휘관과 최소 3번 관계를 가졌다고 했으며, 지휘관은 자신의 아내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14살의 ‘4번 피해자’는 돈과 과자, 주스를 받고 매일 군인들과 관계를 가졌다고 증언했다. ‘7번 피해자’는 유엔 조사관을 만나고 있을 당시 군인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소녀는 군인이 본국에 돌아가면서 교대자로 오는 다른 군인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넘길 것이라고 했다. 소년도 있었다. ‘9번 피해자’는 15살 적부터 3년 동안 평균 하루 4시간씩 100명 이상을 상대했다.
스리랑카 평화유지군은 2004년 아이티 내정 안정화를 위해 주둔하고 있으며, 전체 규모는 900명 수준인 것으로 전해졌다. 유엔 쪽은 2007년 이 문제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유엔 보고서는 “스리랑카에서 온 평화유지군 가운데 최소 134명은 2004~2007년 9명의 어린이를 성적으로 착취했다”고 결론 내렸다. 보고서가 나온 뒤 114명이 본국으로 송환됐지만 아무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고 <에이피>는 전했다.
<에이피>는 2004~2016년 아이티 한 곳에서만 유엔 평화유지군에 의한 150건의 성범죄 사건이 신고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브라질 등 다른 나라 출신의 평화유지군이 자행한 성폭행 사건 피해자 10여명을 취재한 결과, 실제 피해 규모는 더 클 것으로 봤다. 피해자들이 두려움에 신고를 꺼리기 때문이다. 아이티의 변호사로 평화유지군에 의해 임신한 여성들을 돌보는 마리오 조제프는 “유엔이 미국에 들어가 어린이들을 성폭행한다고 상상해 보라. 인권은 돈 많은 백인들만을 위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유엔은 이런 성범죄에 손이 묶여 있는 게 사실이다. 평화유지군에 대해선 사법권이 없으며, 처벌은 군인을 파견한 회원국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회원국들은 자국 군인들을 가볍게 처벌하는 데 그치고 있으며, 유죄 판결을 내려도 신상을 비밀에 부치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달 평화유지군과 직원들의 성범죄에 대처할 새로운 방안을 발표했다. 유엔은 10여년 전에도 비슷한 방안을 발표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안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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