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 백악관을 방문한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를 영접하고 있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12일 백악관 회의실.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가 수행원들과 함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등 미국 행정부 인사들과 마주앉았다. 나집 총리는 밝은 얼굴로 말레이시아항공이 보잉 737 기종 25대와 787 드림라이너 8대를 살 것이고, 머잖아 25대를 더 사 모두 100억달러(약 11조2700억원)어치를 구매하겠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만족한 표정으로 말레이 쪽이 보잉 비행기와 제너럴 일렉트릭 엔진을 합쳐 100억~200억달러어치를 사기로 했다며, 이는 “강력한 양국 관계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상품의 최고 마케팅 책임자처럼 행동하면서 성과를 자랑해왔다. 보잉 여객기와 록히드마틴 전투기가 주력 판매품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민간끼리의 자연스런 계약까지 집어넣어 ‘세일즈 외교’를 강조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날 풍경은 마치 황제의 생일 축하 사절이 진상품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자유무역협정(FTA)이 미국에 손해라는 입장을 피력해온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벌충하려는 듯 현물 판매에 집중한다. 지난 5월에는 첫 방문국 사우디아라비아와 1100억달러짜리 무기 판매 계약을 맺은 것에 대해 “미국에 엄청난 날”이라고 자찬했다. 백악관은 지난 4일 트럼프 대통령과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의 통화를 설명하며 “한국이 수십억달러어치의 미국산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는 것을 개념적으로 승인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는 대만과 타이에 대한 신규 무기 판매를 승인하는 등 아시아 시장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열의가 넘쳐서인지 미국 상품 구매가 ‘알현료’로까지 비치고 있다. 나집 총리는 말레이 연금펀드가 30억~40억달러를 미국에 투자하려고 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물 보따리에 ‘대가’로 내놓은 것은 “만나서 영광”이라는 말과 대테러 활동 공조 등 돈이 들지 않는 내용이다.
불균형한 정상외교에 대해 나집 총리의 절박한 처지가 반영됐다는 해석도 나온다. <로이터> 통신은 “나집 총리는 내년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미국 법무부의 1MDB 펀드에 대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전히 백악관에서 환영받는 인물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했다”고 짚었다. 말레이를 발칵 뒤집은 1MDB 사건은 정부가 만든 이 펀드에서 나집 총리 양아들이 수십억달러를 빼돌렸다는 내용으로, 미국 연방수사국(FBI)도 조사하는 사건이다. 공범이 나집 총리 부인한테 310억원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워싱턴 안팎에서는 이런 때에 미국 대통령이 나집 총리를 만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워싱턴의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 사진 출처: 호텔 누리집
앞서 사우디에 대한 대규모 무기 판매 계약도, 권위주의적 통치로 비판 받는 이 나라를 미국 대통령이 첫 방문지로 택한 것에 대한 보은의 의미가 포함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사울리 니니스퇴 핀란드 대통령과의 백악관 공동기자회견 때는 “핀란드가 우리의 위대한 F-18 여러 대를 구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가, 니니스퇴 대통령이 트위터로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해프닝을 겪었다.
외교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목말라하는 것은 돈이라는 인식이 취임 전부터 퍼졌다. 여기에는 사익도 포함된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의 회사가 운영하는 워싱턴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이 문전성시라며 이곳에서 돈을 쓰는 게 대통령의 환심을 사는 방법으로 여겨진다고 보도했다. 2박3일 일정으로 방미한 나집 총리 일행도 이 호텔에 짐을 풀었다.
이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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