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6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한·미·일 정상이 만찬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3일 오후 1시(현지시각) 하와이 도착을 시작으로 한·중·일을 비롯해 베트남·필리핀에 이르기까지 12일 동안의 아시아 순방에 나선다. 이 기간 동안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트럼프 대통령과 ‘신형 국제관계’를 선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팽팽한 대결을 비롯한 외교 열전이 펼쳐진다.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동북아시아 각국의 세력 각축 움직임과 이에 따른 정세 변화의 방향성을 가늠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6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7일 문재인 대통령, 9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연쇄 회담을 한다. 베트남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아펙) 회의, 필리핀에서 열리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및 동아시아정상회의(EAS) 등에선 미국의 다자 외교력이 시험대에 오른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순방 기간이 1991년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 이후 가장 길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내외적으로 상당히 불리한 입장에서 순방에 나선다. 우선, 국내에서는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러시아와 유착했다는 의혹인 ‘러시아 스캔들’ 당사자들이 기소되면서 곤경에 처해 있다. 야심차게 추진하는 감세안도 의회 통과가 불확실하다.
또한 내년 초부터는 11월 상·하원 중간선거를 향한 본격적인 예비선거가 시작된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도 띠는 내년 의회 선거에서 핵심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선거자금 마련을 위해선 무역적자 해소와 일자리 창출의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상원 선거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공화당이 다수당 자리를 내줄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온다.
탈출구가 필요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순방 동안 무역·통상 분야에서 상당히 공세적으로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백악관 고위 관계자는 지난달 31일 사전 브리핑에서 “한국에서 경제가 핵심적인 논의 분야”라고 강조했다. 북핵보다 통상 문제가 중요하다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방문 때도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대동해 다양한 협정 체결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펼쳐진, 그리고 순방 과정에서 더욱 강화될 ‘미국 우선주의’는 아시아 국가들의 미국에 대한 신뢰를 더욱 깎아내릴 수 있다. 지난달 당대회를 통해 권력을 강화한 시진핑 국가주석의 중국은 ‘빅 텐트’ 전략인 ‘신형 국제관계’를 내세워 ‘미국 우선주의’에 지친 국가들에 손짓하고 있다.
한국과의 사드 문제 해결은 당대회를 통해 내부를 정비한 중국이 주변국과 관계 개선을 하겠다는 첫 신호탄이다. 여기에 더해 아펙 회의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문 대통령과 시 주석의 상호 왕복 방문이 발표된다면 일본과 북한도 중국과 관계 개선에 나설 필요성을 절감하게 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이 12월께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디딤돌 삼아 내년 초쯤 중-일 정상회담 등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할 것이라는 전망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중국 쪽 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한국 및 일본과 관계 개선을 하겠다는 것은 시 주석의 결단”이라며 “통제할 수 없는 트럼프 대통령에 맞서기 위해 중국 안에서 한-중-일 회의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중-일 관계 개선은 일정 부분 일본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일본 쪽 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일본 안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을 신뢰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시 주석의 장기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에서 한-중-일 3국 정상회의가 열리면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2차 정상회담으로 자연스레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12·28 위안부 합의’와 관련한 문제를 매끄럽게 처리하기 어렵다면 문 대통령 방일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중국의 주변국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 공세에 대응해 미국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견제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했다. 중국을 비민주적 국가로 규정하고, 미국-일본-오스트레일리아-인도를 잇는 ‘다이아몬드 민주동맹’으로 중국의 인도양·태평양에서의 세력 확대를 막겠다는 뜻이다.
4국 간 안보 협력을 ‘동아시아판 나토’로 간주하는 중국의 반발 강도에 따라 동아시아 정세는 작용-반작용을 거듭하며 불확실성에 빠져들 수도 있다. 다만, 국내 문제로 발목이 잡힌 트럼프 대통령이 외교에 집중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어 ‘인도·태평양’ 전략은 레토릭에 그치거나 협상카드 정도로 활용할 가능성도 있다.
또한 북핵 우려가 심화될수록 미국이 이를 고리로 한국이 한·미·일 3국 협력 구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더욱 묶어두려고 할 수 있다. 북핵 문제의 돌파구가 빨리 마련될수록 미·중의 한국에 대한 잡아당기기 강도는 약해지고 한국 정부의 운신 폭이 커질 수 있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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