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일 백악관에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공식 인정한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에 서명한 뒤 들어보이고 있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일(현지시각)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또 이스라엘 주재 미국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할 것도 지시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전 세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 핵심 지지층의 환심을 얻는 대가로 ‘세계를 잃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오늘 우리는 마침내 분명한 사실을 인정한다”며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는 현실에 대한 인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며 “그것은 해야 할 옳은 일이고,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엔은 1947년 종교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예루살렘의 특수한 성격 등을 고려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국제 특별관리지역’으로 삼는다는 내용의 결의를 내놨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을 포함한 세계 모든 국가들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는 것을 꺼려왔다. 70여년에 걸친 미국 및 국제사회의 입장을 뒤집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선포가 중동의 화약고를 건드렸다는 비판이 나오는 까닭이다.
이 발표로 ‘미국·이스라엘 대 나머지 국가들’이라는 대립 구도가 뚜렷해졌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예루살렘의 지위는 당사국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직접 협상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8일(현지시각) 긴급회의를 소집해 예루살렘 사태를 논의하기로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미 수많은 잔혹한 분쟁으로 괴로워하는 불안한 세계에 긴장을 촉발할 새로운 요소를 더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며 “예루살렘의 현 상태가 유지돼야 한다”고 말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는 미국의 패권적 지위 추락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 우선,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와 이란 핵협정 파기 등 주요 현안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통행에 ‘뿔났던’ 대서양동맹 국가들이 들고 일어났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이 일제히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발표를 내놨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아랍권도 술렁이고 있다. 미국의 동맹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조차도 “알카에다 등 전 세계 강경 무슬림을 도발하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중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정파 하마스는 “지옥문을 연 결정”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팔 간 ‘정직하고 공평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해온 미국이 설 자리가 지극히 좁아졌다.
일견 무모해 보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 배경에는 내년 11월 중간선거, 나아가 2020년 재선을 위한 정치공학이 자리잡고 있다. 러시아와의 유착 의혹을 돌파하고, 공화당 지지층의 주류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결집시키며, 정치자금과 직결된 유대계의 환심을 사려는 전략이다. ‘선거 공약은 반드시 지킨다’는 이미지로 기존 정치인들과 차별성을 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국내 정치를 위해선 국제 정치를 불쏘시개로 활용하는 것도 개의치 않겠다는 뜻으로, 중동뿐 아니라 한-미 관계, 북핵 문제, 미-중 관계 등 대외 정책 전반에도 이런 일방주의가 관철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나쁜 신호다. <워싱턴 포스트>도 사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은 국내 정치 기반을 다지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라쉬드 칼리디 미국 컬럼비아대 아랍학 교수는 영국 <가디언>에 기고에서 “외교사에 오랫동안 반향을 일으킬 자해행위”라고 비판했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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