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메리 크리스마스’를 언급한 장명을 모은 〈워싱턴 포스트〉의 영상 중 한 장면. 사진 〈워싱턴 포스트〉 영상 갈무리.
“메리 크리스마스.” 취임 뒤 첫번째 성탄절을 맞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 한 마디가 미국에서 화제다. 2015년 공화당 경선 후보 때부터 “내가 대통령이 되면, 모든 상점에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간판을 다시 달 수 있게 만들겠다”고 외쳐 온 트럼프가 ‘드디어’ 미국에 크리스마스를 되찾아 왔다는 거다. 도대체 누가 간판을 빼앗기라도 했다는 걸까.
트럼프는 공화당 경선과 대선기간 내내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를 정치화시키고, 이를 쟁점화해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해 왔다. ‘크리스마스’는 왜 정치적 용어가 됐을까? 미국이 다문화·다인종이 모여 이루어진 사회라는 점을 고려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표현이 다른 종교에 적대적 표현이라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기독교의 예수가 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무슬림들과 유대교 신자들, 또는 힌두교와 불교 신자들에게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즐거운 성탄절 되시라’고 인사를 보내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이유로 일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메리 크리스마스’가 아닌 ‘해피 홀리데이’라는 중립적 표현을 썼다. 트럼프 직전 미국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 역시 2016년 백악관에서 보내는 마지막 크리스마스 카드에 “즐거운 연휴”(Happy holidays!)라는 표현을 썼다. 포용의 맥락이었다. 그 전년인 2015년에도 트위터에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홀리데이스”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인 2016년에 백악관이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 사진 THE OBAMAS/HUFFPOST US.
하지만 트럼프는 달랐다. 2017년 임기 첫 크리스마스를 맞는 트럼프는 11월부터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를 수차례 언급했다. 그는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집회에서 연단에 올라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글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랑스러워했다.
트럼프는 공화당 경선 후보였던 2015년부터 ‘크리스마스’를 정치 쟁점화했다.
〈시비엔 뉴스〉의 보도를 보면 당시 경선 후보였던 그는 “내가 대통령이 되면, 모든 가게에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간판을 다시 달 수 있게 만들겠다”고 외쳤다.
기독교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의도였다. 〈뉴스위크〉의 보도를 보면, 트럼프는 경선과 대선 과정에서 수없이 “우리는 다시 ‘크리스마스’라고 말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가 돌아왔다”고 외쳤으며 심지어 자신의 2016년 대선 캠페인에
‘메리 크리스마스 USA 2016 빅토리 투어
’라는 공식 타이틀을 걸기도 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한 보수 단체는 최근 금발의 소녀가 트럼프에게 “우리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를 되돌려줘서 고마워요. 트럼프”라고 말하는 내용의 영상을 배포했다.
트럼프에게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는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하는 마법의 단어였다.
‘아메리카 퍼스트 팔러시’의 영상에 등장해 “우리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를 되돌려줘서 고마워요. 트럼프”라고 말하는 영상의 한 장면. 사진 유튜브 갈무리.
다인종·다문화 사회인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전쟁’은 자신의 반대편을 공격하는 손쉬운 수단이기도 했다. 최근 20년 동안 이 전쟁에 가장 격렬하게 참여했던 사람은 보수 매체 폭스 뉴스의 앵커였던 빌 오라일리다. 2004년 미국의 유명 백화점 체인 ‘메이시스’(Macy's)가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홀리데이스”라는 표현을 쓰겠다고 밝힌 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는 논쟁적 단어가 돼버렸다. 당시 폭스 뉴스의 앵커 빌 오라일리(Bill O'Reilly)는 “세속적 진보주의자들로부터 크리스마스가 공격을 받고 있다”며 특정 정치 세력을 공격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59년에는 미국의 반공 극우단체인 ‘존 버치 협회‘(JBS)가 “공산주의자들이 크리스마스를 공격하고 있다”는 내용의 팸플릿을 발행한 바 있다. 1920년대에는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를 위시한 반유대주의 세력이 크리스마스의 편에 섰다. 헨리 포드는 당시 조직적인 종교 세력(유대교)이 “크리스마스의 종교적 의미를 없애려 한다”고 주장했다.
〈뉴스위크〉는 트럼프가 크리스마스를 쟁점화하는 행위가 나치와 비슷하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뉴스위크〉는 24일 “트럼프와 나치는 백호 국수주의를 촉진하기 위해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나”라는 기사에서 “나치 역시 크리스마스 캐럴의 가사를 바꾸고, 가난한 독일인들을 위해 자선행사를 여는 등의 방법으로 크리스마스를 나치화한 뒤, 이를 기리지 않는 ‘유대인’을 독일인과 구분 짓기도 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시대의 크리스마스 풍경은 조금 바뀐 것이 확실하다.
〈워싱턴포스트〉는 24일(현지시각) “트럼프를 지지하는 마을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계속 들린다”는 기사를 발행했다. 해당 기사는 인구 1천명 안팎의 동네에 교회가 10개나 있는 테네시(Tennessee)주의 린든(Linden)이라는 작은 마을의 풍경을 전하면서 “법원 청사 앞에 있는 상록수에는 ‘우리의 크리스마스트리’라는 글귀가 걸려있고 중앙로에도 산타클로스와 함께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사인이 걸려있다”며 트럼프를 지지하는 기독교 우세지역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트럼프는 지난 대선에서도 “복음주의(evangelical) 신자들의 표는 제 것입니다. 우리는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다시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라며 기독교 신자들의 크리스마스 사랑을 선거에 활용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약 80%의 복음주의 신자들이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고 전했다. 린든 타운이 속한 페리 카운티에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단어가 넘쳐나는 이유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대선에서 페리 카운티의 76%가 트럼프를 찍었다고 전했다. 미국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현재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승리 선언인 셈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가족들에겐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를 주입하지 못한 것 같다. 트럼프의 자녀들은 ‘해피 홀리데이’라는 표현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차남인 에릭 트럼프는 자신의 트위터에 ‘트럼프 와이너리’를 선전하며 ‘해피 홀리데이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트럼프의 장녀이자 ‘대통령 특별 고문’을 맡은 이방카 트럼프 역시 자신의 트위터에 크리스마스트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해피 홀리데이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트위터의 보수주의자들은 “우리는 ‘해피 홀리데이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너희의 아버지가 ‘메리 크리스마스’를 다시 살려내지 않았느냐”며 트럼프의 자녀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특히 유대인 남편(재러드 쿠슈너)과 결혼해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카 트럼프에게 비난이 집중됐다.
박세회 기자
sehoi.par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