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미 대통령의 연설은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이어 24년 만이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지난 노고에 감사드리며, 임기가 즉각 종료됐다’고 일방적으로 통보가 왔다.”
미국 에머리대학교 보건대의 역학자이면서 ‘후천성 면역 결핍증후군(HIV)/에이즈(AIDS)’ 관련 자문기관인 미국 국가자문회의(PACHA, presidential advisory council on HIV/AIDS) 소속 위원이었던 패트릭 설리반은 최근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백악관으로부터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해임 통지서를 받았다”고 말했다. 2016년 5월에 전문위원으로 위촉된 설리반의 임기는 4년으로, 아직 임기가 2년 넘게 남은 상태였다.
■트럼프 정부, HIV/에이즈AIDS 자문위원 전원 ‘해임’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에이즈 국가자문회의(이하 PACHA) 소속위원 10명을 모두 해임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지난 6월 중순 PACHA 소속 자문위원 6명이 트럼프 대통령의 불통과 무관심을 규탄하며 사임한지 6개월 만이다. 역학자 등 보건의료 전문가와 시민단체, 사회활동가 등으로 구성된 PACHA는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에이즈와 관련해 백악관에 조언을 하는 공식 기구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1987년 설립을 약속했고, 클린턴 정부가 1995년 처음 세웠다.
이번에 해임 통보를 받은 또다른 성소수자(LGBT,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전환자) 활동가인 가브리엘 말도나도는 “해임 사유가 여전히 불분명하다”며 “오바마 정부에서 지명한 내 임기는 2018년까지였지만 트럼프 정부 사람들로 채우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트럼프 정부가 성소수자와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에이즈 관련 정책에서도 전(오바마) 정부 지우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설리반은 또 다른 매체인 <워싱턴블레이드>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위원회는 지난 8월 이후 회의를 한 번도 열지 못한 상황이었고, 현 정부가 2020년까지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에이즈 관련 정책을 확립할 것을 촉구해 왔다”며 “이는 시민의 건강에 중요한 이슈이고, 추가 감염을 막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PACHA의 대표직을 맡았던 케이 헤이스는 이에 대해 “오바마 정부도 새로운 목소리를 듣기 위해 부시 정부의 자문위원들을 모두 해임한 바 있다”며 트럼프 정부의 새로운 현상이 아님을 강조했다. 하지만 위원들은 이런 해명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2014년 이후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다 지난 6월 스스로 물러난 스콧 쇼이츠는 “전 정부는 적어도 교체시기까지 최대한 임기를 마칠 수 있도록 허락했었다”고 반박했다. 이밖에도 해임된 자문위원들은 에이즈 정책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인수인계가 잘 이뤄져야 하는데 무리하게 교체를 추진한다고 입을 모았다.
■‘트랜스젠더’ 단어 사용 금지, 에이즈 예방 예산 삭감
트럼프 정부의 보건정책이 거꾸로 가고 있다는 지적은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트랜스젠더(성전환자)와 태아 등 특정 단어를 정부 보고서에 적지 못하게 했다는 보도가 나와 논란이 불거졌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달 16일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정책 분석 담당 공무원들이 2019년도 예산 관련 설명회에서 취약한(vulnerable), 재정 지원 혜택(entitlement), 다양성(diversity), 트랜스젠더, 태아(fetus), 증거 기반(evidence-based), 과학 기반(science-based) 등 7개 금지어를 전달받았다고 보도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예산 편성을 위한 정책 분석 보고서를 작성할 때 이들 금지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이런 조처는 보수 정권인 트럼프 정부가 싫어하는 단어를 보고서에 담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로 풀이된다. 담당 공무원들은 반발하고 있다. 분석관들은 “CDC는 지카 바이러스가 태아에 미치는 영향이나 트랜스젠더 에이즈 예방 문제 등을 직접 다루는 기관”이라며 “정권의 이념 때문에 보고서에 특정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기는 처음”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트럼프 정부는 2018년도 예산에서 보건관련 부분을 대폭 삭감했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의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에이즈 예방 프로그램에서 1억5000만 달러를 줄였고, 국제 원조와 관련해서는 1억 달러 넘게 축소시켰다. 현재 미국에만 120만명이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에이즈 인구로 분류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3700만명이 감염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뒤 인터넷 누리집에서 성소수자(LGBT) 관련 내용을, 환경보호청(EPA)은 기후변화 관련 페이지를 각각 삭제해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살아만 있길…’ 아이티 사람들이 포르토프랭스에서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에서 생존자를 찾고 있다. 잔해 더미에 깔린 자동차들의 모습도 보인다. 포르토프랭스/AP 연합뉴스
■트럼프 “아이티 출신은 모두 에이즈 감염자” 망언
트럼프 대통령의 성소수자와 인종에 대한 혐오는 정책 뿐만 아니라 공식석상에서 발언을 통해서도 연일 논란이 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6월 아이티 출신 이민자들에 대해 “모두 에이즈(AIDS) 감염자”라고 발언했다고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지난 달 23일에 보도하면서 비판 여론에 직면하는 일도 있었다.
카리브 해의 작은 섬나라 아이티는 2010년 ‘아이티 강진’을 겪었고, 당시 오바마 행정부가 아이티 국민에 대해 미국 거주가 가능한 임시보호지위(TPS)를 부여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갱신 없이 TPS를 만료한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이들이 2019년 7월까지 아이티로 돌아가야 한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미국 내 4만명의 나이지리아 출신자에 대해서 “미국을 한 번 보게 된다면 결코 그들의 오두막(hut)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며 차별적 발언을 했다고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이런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이 당시 백악관 집무실에서 비자 정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국토안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과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발급되는 상당수 비자는 단기 여행비자”라고 설명하려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고 익명의 관계자들은 증언했다. 백악관은 성명을 통해 이러한 뉴욕타임스의 보도를 즉각 부인했지만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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